인류 구원사로 읽는 선민 이야기 <3>재림을 둘러싼 ‘같은 방식’과 ‘완성의 방식’ 간 차이

재림은 반복이 아니라 완성이다

 

‘그가 다시 오시리라’는 말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형성된 초대 교회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이었다. 이는 또 구원사가 아직 역사 속에서 완결되지 않았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행 1:11; 고전 16:22). 그렇다면 재림은 왜, 무엇을 위해 필요한가, 그리고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가. 

 

많은 신앙적 상상 속에서 재림은 종종 ‘다시 한 번의 초월적 개입’으로 그려진다. 하늘에서 온 존재로서 다시 등장하는 동일한 예수, 동일한 권능, 동일한 심판의 장면. 이러한 상상은 성서적 개념에서 비롯되었지만, 한 가지 근본적 문제를 안고 있다. 하나님은 왜 한 번의 초월적 개입으로 모든 것을 끝내지 않고, 역사 안에서 단계적으로 전진하는 구원사를 택했을까. 만일 재림이 초림의 반복이라면 인류 역사는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을 완성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 구원사는 반복의 역사라기보다 전진과 성숙의 역사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게티 센터에 소장된 작가 미상의 13세기 작품 〈어린양 혼인잔치〉.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구원을 파괴적 종말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과 연합으로 완성되는 사건으로 묘사된다.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

하나님은 같은 방식으로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출애굽은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또 다른 바로를 세우고, 또 다른 홍해를 가르는 장면을 되풀이하지 않으셨다. 율법도 예언으로 확장되었으며, 예언은 독생자의 사건으로 넘어갔다. 매 단계는 이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는 방식을 택해 진행되었다. 재림 역시 이 구원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의 초림은 분명 혁명적이었고, 그 혁명성은 구원의 방향 전환에 있었다. 율법에서 은혜로, 민족에서 인류로, 행위에서 관계로의 전환을 말한다. 그렇다면 재림의 혁명성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초림의 방식을 반복하는 데 있지 않고, 초림이 열어 놓았으나 역사 속에서 아직 실현되지 못한 지점을 채우는 데 있어야 한다. 독생자의 사역은 인류 구원의 문을 여는 데까지는 이르렀지만, 인류 전체의 관계 질서를 새롭게 세우는 단계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개인의 구원은 선포되었지만, 가정과 사회, 인류 공동체의 실체적 재창조는 여전히 과제로 남았다. 이 미완의 지점이 바로 재림이 요청되는 자리다.

 

따라서 재림은 ‘같은 방식’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같은 방식의 재림은 같은 한계를 반복할 뿐이다. 이는 십자가의 대속(代贖)이 개인의 죄 사함을 넘어 인류 역사 전체를 완성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인식이다. 다시 한 명의 독생자가 나타나, 다시 희생을 반복하는 방식이라면 인류 역사는 여전히 고통의 순환 속에 머물게 된다. 구원사가 전진하려면 재림은 희생의 반복보다 창조의 완성이어야 한다.

 

성서가 재림을 혼인 잔치의 이미지로 암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마 22장). 성서에 등장하는 ‘어린양 혼인잔치’에서 전통 기독교의 해석은 어린양은 예수를 지칭하고, 혼인잔치는 재림이후 구원이 완성된 종말적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일부 신학에서는 혼인잔치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과정으로 언급되거나, 하나님과 인간, 그리스도와 공동체, 인간과 인간 등의 총체적 관계 회복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관련해 예수 자신은 여성과의 혼인(배필)을 염두에 두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렇다고 “혼인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 

 

혼인은 단독적 주체의 행위가 아니라, 둘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낳는 구조다. 구원이 개인의 죄 사함에서 멈추지 않고, 인류 전체의 존재 양식을 바꾸는 단계로 나아가려면 구원사의 주체 역시 단독이 아니라 관계적이어야 한다. 이 점에서 재림은 초림의 목적을 실현하는 사건이 된다. 예수는 길을 열었고, 재림은 그 길 위에서 인류가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질서를 세워야 한다. 다시 말해, 재림은 “다시 오심”을 넘어 “마침내 이루심”이어야 한다. 이러한 재림에 대한 이해는 단순한 종말론적 공포나 신비 체험에서 해방시킨다. 재림은 세상을 끝내기 위해 오는 사건이 아니다. 세상을 완성하기 위해 오는 사건이다. 이때 심판은 세상이 사라지거나 파괴가 아닌 질서 회복이라는 목적 아래 재배치된다.

 

만일 재림이 완성의 방식이라면, 그 완성은 어떤 구조를 가져야 하는가. 개인 구원의 완성을 뛰어넘어 인류 공동체의 재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주체는 누구이며, 어떤 형태로 등장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개념을 호출한다. 초림이 독생자로 시작되었다면, 완성의 단계에서는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구원사는 단독의 주체에서 한발 더 나아가 관계와 결합의 구조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관계와 결합, 창조와 재생산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요청되는 주체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