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에서 모델로 출발해 24세 연상 뉴욕 부동산 재벌과 결혼하고 미국 영부인이 된 한 여성의 삶은 훌륭한 다큐멘터리가 될 법하다.
그러나 지난달 30일 전 세계 동시 개봉한 다큐멘터리 ‘멜라니아’(사진)는 그 가능성을 철저하게 외면한다.
영화는 남편의 두 번째 대통령 취임식을 앞둔 멜라니아 트럼프의 20일을 따라간다.
다큐 ‘멜라니아’ 의 한 장면. 누리픽처스 제공
영부인에게 분주한 시기다. 무도회와 연회 초대장을 준비하고, 만찬장 테이블 세팅까지 점검해야 한다. 멜라니아와 스태프들은 테이블보에 들어갈 금색 줄무늬 폭을 두고 신중을 기한다.
화면 속 멜라니아는 완벽히 세팅된 차림으로 아찔한 높이의 스틸레토 힐을 신은 채 마러라고에서 트럼프타워, 백악관을 오간다. 그는 백악관의 정치적 현실과는 거리를 둔 채, 다가올 만찬과 드레스의 세부 사항에 몰두하는 듯 보인다. 이 영화에서 ‘드라마’라 부를 만한 요소가 있다면, 취임식에서 입을 흰 블라우스 칼라 뒷목 높이가 충분하지 않다는 걱정 정도다. 1인치도 되지 않는 차이 때문에 재단사들은 진땀을 뺀다. 트럼프 대통령은 간간이 등장해 ‘역사상 최고의 영부인’이라며 멜라니아를 치켜세우거나, 자신의 취임식이 대학 풋볼 플레이오프 내셔널 챔피언십 중계와 겹쳤다고 불평할 뿐이다.
‘멜라니아’는 멜라니아 트럼프가 각본·연출·제작·내레이션까지 도맡아 스스로 서사를 쓰고,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나열한 다큐멘터리다. 그가 설정한 서사에 질문을 던지거나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인물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남는 것은 인물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얼마나 치밀하게 관리된 이미지인가에 대한 인상뿐이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을 철저히 지운 결과, 관객들이 가장 궁금해할 흥미로운 질문들 역시 화면 밖으로 밀려난다. 대표적인 것이 ‘역사상 가장 비싼 다큐멘터리’로 불리는 이 기획이 어떻게 성사됐느냐 하는 점이다. 아마존 MGM 스튜디오는 이 다큐멘터리를 극장과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공개하기 위해 4000만달러(약 580억원)를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미 흥행 성적은 예상치를 웃돈다. 박스오피스모조에 따르면 이 영화는 개봉 첫 주 북미에서 700만달러(약 102억원)를 벌어들이며 박스오피스 3위로 출발했다. 미 매체 할리우드 리포터에 따르면 흥행이 두드러진 지역은 텍사스와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등 보수 성향 주들이었다.
비평은 냉혹하다. 2일 기준 로튼토마토에서 평론가 신선도 지수는 10%에 그쳤다. 연출을 맡은 브렛 래트너는 2017년 미투운동 당시 성범죄 혐의로 고발된 이후 활동을 중단했다가, 이 다큐멘터리로 복귀했다.
공교롭게도 영화 개봉 당일 미 법무부가 공개한 ‘엡스타인 파일’에는 제프리 엡스타인과 신원이 가려진 두 명의 여성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는 래트너의 사진이 포함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