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에 기댄 남북평화 한계… ‘맞춤 제재’로 대화 틈 노려야 [창간37-격변의 한반도, 평화의 길]

<중> 대화 지렛대, 외교 패러다임 전환

4월 美·中 정상회담 남북관계 대전환 계기
일각 “한반도 문제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

유예·라이선스·조건부 허용 등 제재 다양
언제든지 복원 가능… 외교 압박 수단으로

北 수출 대금 제3자 계좌 보관·인도적 사용
李정부 ‘新 평화교역 시스템’ 제안해 주목

北의 ‘글로벌 사우스 밀착’도 새로운 기회
대북 외교 새 채널로 급부상
‘4월 이후 남북 대화의 바늘구멍은 뚫릴까.’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초미의 관심사는 4월 개최될 것으로 보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이다. “과거엔 원수인 척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진짜 원수가 돼 가는 것 같다”(이재명 대통령)는 남북 관계에 대화, 교류의 단초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러나 두 정상의 만남이 우리 기대대로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여지가 없는” 남북 관계에 변화를 이끌지는 미지수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한반도에 대한 관심, 영향력이 옛날 같지 않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분명해서다. 최근 남북 관계를 이야기할 때 역발상, 창의성이 자주 언급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북한을 옥죄고 있는 국제제재 속에서 오히려 실마리를 찾고,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여겼던 글로벌사우스(비서구권·개발도상국·제3세계 국가)에 주목해야 한다는 시각이 강하다. 남한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는 데는 외교적 지렛대를 다양화하는 게 필수다.

 

◆미·중, 한반도 변화 이끌까

 

미·중 정상회담은 꽉 막힌 남북 관계에 숨통을 틔울 계기로 주목받는 ‘빅이벤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대화에 적극적인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시 주석이 만나 한반도 정세 안정, 평화정착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한다면 극적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기대가 크다.

(왼쪽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 방한을 앞두고 김 위원장과 만나길 희망하며 방한 일정 연장, 심지어 북한 방문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북한이 끝내 침묵하며 당시엔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비핵화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있다는 점은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 수 있는 강력한 유인책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9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면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북·미 정상의 만남이 성사되고, 이를 한국이 뒷받침하면 이 대통령의 ‘미국 피스메이커, 한국 페이스메이커’ 구상이 현실화되는 셈이다. 김태형 숭실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의지가 분명하고, 김 위원장도 거부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고 평가했다. 다만 “미국이 선제적으로 비핵화 의제 후퇴나 다른 형태의 보상을 줘야 한다”며 “미국의 최근 국가안보전략(NSS) 흐름을 보면, 이런 접근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고 분석했다.

 

시 주석이 북한을 대화로 이끄는 중재자 역할을 해줄지도 관심사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에게 중재자 역할을 요청하는 한편 서울∼평양∼베이징을 잇는 철도 건설, 원산갈마관광지구를 활용한 3국 관광 등 남북한과 중국이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한반도 평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미·중 정상회담 전에 중국을 방문하는 계획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월 5일(현지시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한중 MOU 체결식에서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문제는 우리의 기대대로 양 정상이 한반도 문제를 회담 테이블에 올려놓을지,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인지 여부다. 미국의 경우 서반구(아메리카대륙)를 중심으로 한 자국우선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이른바 ‘돈로주의’가 강화되며 한반도 문제는 외교·안보 정책에서 점차 후순위로 밀려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이는 한반도에 추가 비용과 정치적 자원을 투입할 필요성이 낮다는 판단으로 이어지고, 북한에 대한 적극적 대응보다는 관망과 현상 관리에 무게를 두는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다자 협의보다는 정상 간 직거래를 선호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특성상 미국이 주도하는 한반도 정세 관리에서 한국의 역할과 발언권이 축소될 우려도 제기된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도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양국은 여전히 전략적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북한은 대외 전략과 군사·핵 정책에서 중국의 이해와 조율에 구속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강화해 왔다. 이에 따라 중국의 전통적인 ‘조정자’ 역할은 점차 제한되는 양상이다. 대표적인 것이 핵·미사일 문제다.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 과정에서도 중국의 우려, 반대에 개의치 않고 독자적인 결정을 내려왔다. 북한이 중국을 후견국이 아닌 하나의 협력 파트너로 재정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된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추진해도 (북·미의) 전면적 관계 개선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며 “김 위원장이 미국을 상대로 핵보유국 인정, 대규모 제재 해제 같은 ‘통 큰 양보’를 요구할 수 있지만 아무리 트럼프 대통령이라고 그렇게까지는 힘들다”고 전망했다.

 

◆외교 보폭 확대, 대화 지렛대 다양화

 

미국, 중국의 영향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남북 대화를 이끄는 데 두 나라에만 의지할 일은 아니다. 다양한 외교적 지렛대를 찾아 다양한 틈을 만들고, 그 크기를 늘려야 한다. 대북제재에서 대화 실마리를 찾는 역발상, 북한이 중국, 러시아에 더해 글로벌사우스와의 외교를 확대하는 것에 착안한 창의적 방안 모색이 필요한 것이 이 지점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 인민 항일 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 기념 열병식에 앞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등 참석 정상들과 함께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대북제재는 남북 대화, 교류를 제한하는 시스템임이 분명하지만 실제 작동방식을 보면 활용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국제사회의 제재는 고정된 규범이라기보다는 유예, 라이선스, 조건부 허용 등을 통해 끊임없이 조정되기도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대표적인 반미 국가인 베네수엘라, 이란을 다뤄온 방식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은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금융·에너지 제재를 가했지만 자국 석유기업 셰브론이 베네수엘라에서 활동하는 걸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신규 투자와 제3국 수출은 금지하고, 원유는 미국 내 정유시설로만 반입하도록 통제하는 방식이었다. 하상섭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국은 우고 차베스 대통령(1999∼2013년 재임) 시절부터 베네수엘라에 제재 유예를 부여해 왔다”며 “라이선스의 경우 기한이 정해져 있고, 언제든 스냅백(Snapback·유예한 제재의 복원)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외교적 지렛대로 활용돼 왔다”고 분석했다.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해 제재를 가한 이란에 대해서도 인도가 참여한 이란 남부 차바하르 항구 개발 사업에는 예외를 적용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제시한 에스크로 계좌(거래대금을 은행 등 제3자에게 보관했다가 조건 충족 시 정산하는 계좌) 기반 ‘신(新)평화교역시스템’는 이런 사례와 비슷한 맥락을 가진다. 정 장관은 북한이 수출로 벌어들인 대금을 에스크로 계좌에 예치한 뒤, 이를 민생·보건 등 인도적 물자 수입에 한해 사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제재를 해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제재의 틀 안에서 관리 가능한 교역 구조를 설계하자는 구상이다.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지적이 적지 않지만 과거 이란 제재 국면에서 한국 원화와 이란 리얄화 결제시스템을 통해 이란산 원유를 수입한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원유 대금은 국내 은행에 예치됐고, 이를 이란이 한국산 물품을 수입하는 데만 사용하게 해 달러 결제와 국제결제망을 우회했다. 김혁 한국외대 교수는 “원화·리얄화 결제시스템은 국제제재 체제 안에서도 충분히 설계 가능한 정책적 공간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라고 설명했다.

 

북한이 글로벌사우스를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를 펼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재명정부가 강조하는 글로벌사우스 외교전략이 성과를 거둔다면 여기서 대화의 물꼬가 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코로나19 팬데믹 종료 이후 글로벌사우스와의 교류를 크게 확대했고 비동맹운동정상회의, 개발도상국정상회의, 브릭스 회의 등에 참여했다. 북한·글로벌사우스 교류에 큰 역할을 하는 게 러시아다. 러시아를 매개로 벨라루스, 우즈베키스탄 등 독립국가연합(CIS) 소속 국가와의 외교에 적극 나섰다. 2024년 11월 통일연구원 발표 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글로벌사우스 외교 17회 중 6회가 러시아에서 이루어졌다. 회원국이 아님에도 브릭스에 북한이 참여한 데는 러시아의 주선 혹은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0월 최선희 외무상이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열린 유라시아 안보 국제회의에 참석한 것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당시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상대로 적극적인 대화 의사를 표시하던 때라 외교정책의 수장인 최 외무상이 북한을 떠나 회의에 참석한 것이 더욱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