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기가 무섭다는 말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유독 추운 이번 겨울, 따뜻한 이불 속에서 까먹던 귤이나 달콤한 딸기 한 알의 여유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지는데요. 대형마트 과일 코너 앞에서 가격표를 보고 한참을 망설이다 빈손으로 돌아서는 시민들의 한숨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4일 오후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주부 이모(42) 씨는 딸기 팩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다 결국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이 씨는 “아이들이 딸기를 정말 좋아하는데, 한 팩에 2만원이 넘으니 선뜻 장바구니에 담기가 무섭다”며 “이제 딸기는 특별한 날에만 먹는 ‘귀빈용’ 과일이 된 것 같다”고 씁쓸해했습니다. “월급 빼고 다 올랐다”는 푸념이 절로 나오는 요즘, 우리 식탁의 풍경을 바꿔놓은 것은 다름 아닌 기후 변화였습니다.
◆5년 만에 8만톤 증발…딸기는 이제 ‘귀빈용’
단순히 “올해 농사가 좀 안 됐다” 수준으로 치부하기엔 데이터가 가리키는 현실이 너무나 엄혹하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과 유통업계 자료를 종합 분석한 결과, 딸기 생산 기반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징후가 포착됐다. 2019년 23만4000톤에 달했던 국내 딸기 생산량은 2024년 15만5000톤으로 급감했다. 불과 5년 사이 전체 물량의 약 34%가 시장에서 증발한 셈이다.
충남 논산에서 20년째 딸기 농사를 짓고 있는 김모(62) 씨는 하우스 안의 시든 모종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 씨는 “지난해 여름 폭염은 정말 지옥 같았다. 뜨거운 열기에 모종 절반이 타 죽었고, 겨우 다시 심었더니 가을 폭우에 병해까지 겹쳤다”며 “평년 같으면 하우스가 딸기 향으로 가득 찰 시기인데, 올해는 출하 물량이 예년의 절반도 안 된다”고 토로했다.
공급이 줄어드니 가격은 천정부지다. 가락시장에서 거래된 설향 딸기(특·2kg)는 3만7000원대를 넘어섰고, 소매점에서는 2만원대 가격표가 기본이 됐다.
◆“못난이 귤조차 1만원 시대”…서민 과일의 배신
더 큰 문제는 딸기의 대체재 역할을 해야 할 감귤마저 ‘금(金)귤’ 대열에 합류했다는 점이다. 제주감귤출하연합회는 올해 생산량이 전년 대비 18%가량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제주 현지의 기상 악화와 해거리가 겹친 탓이다.
가락시장 경매 데이터를 뜯어보면 흥미롭고도 씁쓸한 현상이 발견된다. 상품성이 떨어져 헐값에 넘겨지던 하등급, 이른바 ‘파지’ 감귤의 가격 폭등이다. 서귀포시에서 감귤 농장을 운영하는 설모(68) 씨는 “3월부터 자식처럼 키워온 열매가 무더위와 폭우에 갈라지고 떨어진 것을 보면 가슴이 찢어진다”며 “물량이 너무 귀하다 보니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못난이 귤조차 없어서 못 파는 지경”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3일 기준 하등급 감귤(3kg) 거래가는 1만5912원으로, 직전 일주일 평균보다 무려 56.7%나 뛰었다. ‘못난이 과일’조차 박스당 1만원을 훌쩍 넘기는 기현상은 현재 과일 수급 불균형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수입 과일’로 급한 불 끈다지만…
장바구니 물가가 민생 경제의 뇌관으로 떠오르자 정부는 긴급 처방을 내놨다. 망고, 파인애플 등 수입 과일에 할당관세를 적용해 국산 과일 수요를 분산시키겠다는 복안이다. 당장 설 명절을 앞두고 성수품 공급을 평시보다 늘려 가격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방침이다.
유통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봐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기후 위기로 인한 작황 부진이 상수(常數)가 된 상황에서, 단순히 수입을 늘리는 땜질식 처방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국내 생산 기반을 보호할 근본적인 대책 없이는 매년 겨울마다 ‘과일 없는 식탁’을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