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빌딩 숲도 무릎 꿇었다”…붉은 벽돌 한 장에 4000만원, 성수동의 ‘짜릿한 역전극’

여의도·테헤란로 압도한 연무장길 오피스 몸값…공실률 0%대에 “권리금 줄게 방 빼달라” 비명
사옥 팔아 900억원 남긴 무신사 초대박 신화에 자본 집결…힙한 기업 인증서 된 ‘성수 주소지’
기름때 묻은 공방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유니콘들, 화려한 스카이라인이 덮어버린 성수의 민낯

“사장님, 제발 대기표라도 좀 주세요. 강남보다 월세를 더 낸다는데 왜 방이 없습니까?”  

 

강남과 여의도를 떠난 IT 유니콘 기업들이 속속 집결하면서, 과거 수제화 거리의 낭만 대신 평당 1억원을 상회하는 토지 거래가와 폭등하는 임대료가 이 지역의 새로운 문법이 되고 있다. 서울 성동구 소재 서울숲. 서울시 홈페이지 캡처

4일 오후, 서울 성동구 성수동 연무장길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 판교에서 올라왔다는 IT 기업 대표 김모(45) 씨가 연신 땀을 닦으며 하소연했다. 직원들이 “성수동으로 이사 안 가면 회사를 옮기겠다”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혹했다. “방 없어요. 지금 터파기 시작한 건물도 이미 대기업들이 침 발라놨습니다.” 낡은 금속 가공소의 쇳가루 냄새 대신 돈 냄새가 진동하는 이곳, 성수동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겁고도 잔인한 ‘부동산 전쟁터’다.  

 

◆강남·여의도 제쳤다…‘벽돌 한 장 4000만원’의 충격  

 

성수동이 강남의 ‘위성 도시’ 취급을 받던 건 이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다. 최근 성수동 오피스 시장은 서울 전체의 ‘포식자’로 군림하고 있다.  

 

이지스자산운용이 보유했던 ‘팩토리얼 성수’가 교보AIM자산운용에 약 2548억원에 팔린 사건은 시장에 거대한 균열을 냈다. 연면적 기준으로 계산하면 평당 4000만원이 넘는다.

 

대한민국 금융의 심장이라는 여의도 파이낸스타워(평당 2700만원)는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고, 강남 업무지구(GBD)의 상징인 삼성동 빌딩 거래가마저 따돌렸다. 성수동 붉은 벽돌 한 장의 가치가 테헤란로의 통유리 빌딩을 앞질렀음을 뜻한다.  

 

◆“돈은 얼마든 낸다, 빈방만 다오”…멈춰버린 공급 법칙  

 

가격이 미친 듯이 뛰는 이유는 수요와 공급의 저울이 완전히 깨졌기 때문이다. 현재 성수동 오피스 공실률은 0.5%에서 0.9% 사이를 오간다. 사실상 ‘빈방 제로’다. 서울 평균 공실률이 2~4%인 것과 비교하면 기이할 정도의 인기다.

 

강남 빌딩 숲에는 가끔 ‘임대 문의’ 현수막이 걸리기도 하지만, 성수동 신축 빌딩은 도면이 나오기도 전에 임차인이 결정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임대료는 천정부지다. 2021년 평당 21만원 수준이던 실질 임대료는 2년 만에 29만원을 돌파했다. 상승 폭이 서울 평균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이제 갓 걸음마를 뗀 스타트업에게 성수는 ‘꿈의 무대’가 아니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통곡의 벽’이 되어가고 있다.  

 

◆유니콘들의 ‘성수행’ 성지순례…문화가 권력이 된 도시  

 

비명을 지르면서도 기업들이 성수로 몰려드는 이유는 하나다. ‘성수동 주소지’가 곧 ‘힙한(Hip) 기업’이라는 인증서가 되기 때문이다.  

 

크래프톤, 무신사, 쏘카 등 내로라하는 유니콘 기업들이 이미 성수에 둥지를 틀었다. 최근에는 강남파이낸스센터를 떠난 게임사 ‘111퍼센트’와 여의도를 지키던 GC녹십자 계열사들까지 성수로 짐을 옮겼다.

 

낡은 붉은 벽돌 공장 너머로 세련된 유리 외벽의 오피스 빌딩이 솟아오른 성수동 거리는 지금 ‘공실률 0%’의 전쟁터다. 무신사 서울숲 프로젝트 1호 매장. 무신사 뉴스룸 갈무리

이는 단순한 사무실 이전을 넘어 기업의 DNA를 바꾸겠다는 선포와 같다. 과거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은 기술자들이 걷던 거리는 이제 맥북을 든 개발자와 트렌드에 민감한 마케터들로 완전히 물갈이됐다.  

 

◆화려한 ‘잭팟’ 뒤에 가려진 씁쓸한 민낯  

 

성수동의 화려한 스카이라인 뒤에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짙은 그림자가 깔려 있다. 기업들에게 이곳은 사옥 마련을 넘어선 거대한 ‘부동산 투기장’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무신사다. 2019년 약 220억원에 사들인 부지에 지은 사옥을 4년 만에 1115억원에 매각하며 900억원에 가까운 시세 차익을 거뒀다. 이런 ‘대박 신화’는 기업들의 사옥 매입 열풍을 더욱 부채질하고, 이는 다시 땅값을 밀어 올리는 악순환을 만든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평당 1억원을 호가하는 땅 위에서 8000원짜리 백반집이나 수제화 공방이 버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며 “결국 성수동만의 독특한 다양성은 사라지고, 거대 자본이 세운 유리 빌딩만 남는 ‘제2의 강남’이 될까 우려된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