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한동훈 제명 사태’로 인한 당내 논란의 돌파구로 재신임 카드를 꺼내 들면서 실제 전당원 투표 성사 여부에 정치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장 대표가 제안한 재신임 투표는 자신이 계속 대표로 있어도 되는지 투표를 통해 당원들의 정치적 신뢰를 다시 확인해보겠다는 의미다. 다만 장 대표는 재신임을 요구하는 쪽도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사실상 현역 의원이나 광역단체장이 직을 걸고 나서야만 재신임 투표가 진행될 수 있는 형국이다.
◆한국서 단임제 생소한 이유는
한국 정치에서 재신임은 다소 생소한 개념이다. 6일 정치권에 따르면 현 국회법과 주요 정당의 당헌·당규에 재신임 개념이 포함된 조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신임은 중요한 직위나 임무를 맡았던 사람을 믿고 다시 그 직위나 임무를 맡는 개념이다. 탄핵은 정치적인 반대파 등이 요구해 법적 판단으로 파면 여부를 결정하는 것과 달리, 재신임은 당사자의 요청으로 투표를 통해 정치적 결정을 재확인하는 방식이다.
당사자의 요구가 없더라도 대통령 중임제를 채용한 국가에서는 대통령의 연임 여부를 결정짓는 대선이 곧 재신임 투표가 된다. 미국의 경우에는 여기에 더해 대통령 4년 임기 도중에 중간선거도 있다. 임기 2년차 11월에 하원 전체와 상원의 약 3분의 1 의석, 주지사 등을 선출하게 되는데 사실상 재신임의 의미가 포함돼 있다. 중간선거의 승리는 대통령의 그간 국정 운영 성과를 인정받는 동시에 남은 2년 임기 동안 의회와 함께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어갈 권한을 다시 부여받게 된다는 뜻이다.
비슷한 개념으로 의원내각제에서도 재신임의 개념이 존재한다. 일본의 경우 하원 격인 중의원 선거가 4년마다 열리면서 내각이 재신임을 받는 구조다. 총리가 자발적으로 재신임 여부를 정할 수도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지난달 23일 “총리직을 걸고 국민에게 신임을 묻겠다”며 중의원 해산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오는 8일 조기 총선이 열리게 된다.
반면 한국은 1987년 체제로 대통령 단임제가 굳건히 자리 잡아온 만큼 굳이 별도의 재신임 규정을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일단 국민의 선택으로 대통령이 뽑히면 5년 임기 동안 국가원수로 막대한 권한을 누리는 동시에 그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정치사에서도 간혹 지지율 위기를 돌파하거나 정치적 동력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재신임 투표가 추진된 사례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 오세훈 서울시장 재신임 도전
2003년 10월 13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재신임 투표를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여당인 민주당의 내분으로 신당 추진파가 탈당해서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등 정계개편이 본격화했고, 노 대통령은 측근 비리와 대선 자금을 둘러싼 의혹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당시 노 대통령은 내각과 청와대 비서실 개편 등 국정쇄신의 동력을 얻기 위해 재신임 카드를 꺼내 들었고, 구체적인 국민투표 시점(12월15일)까지 제시했다. 하지만 이만섭 전 국회의장 등은 노 대통령의 제안이 위헌이고, 국정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취지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소원 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각하 결정을 내렸지만, 정치권에서 노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 철회 요구가 이어졌다. 결국 노 대통령이 나서 “국민투표가 불가능하면 철회하겠다”고 밝히면서 실제 투표 성사로 이어지진 못했다.
광역자치단체장 중에선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재신임 도전에 나선 사례가 있다. 2010년 12월1일 서울시의회는 서울시내 모든 학교에 전면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내용의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오 시장은 무상복지가 시민의 재정부담을 악화시키는 표퓰리즘이라고 반발하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당시 야당이 의석 4분의 3을 거머쥔 여소야대 구도였던 서울시의회는 곧장 무상급식 조례안을 재의결한 뒤 시장 대신 서울시의회 의장이 공포하기에 이른다. 오 시장이 주민투표 안건 특별발의로 2011년 8월24일 주민투표가 확정됐고, 투표를 사흘 앞둔 시점에 오 시장은 투표율이 33.3%에 미달하면 시장직을 사퇴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주민투표는 두 가지 문구 중 한 가지를 고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서울시의 안은 소득 하위 50%의 학생을 대상으로 2014년까지 단계적으로 무상급식을 하는 내용이었고, 민주당 안은 소득 구분 없이 초등학교는 2011년부터, 중학교는 2012년부터 전면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오 시장과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선별적 복지와 민주당의 보편적 복지가 정면으로 충돌했던 셈이다.
투표 결과는 오 시장의 패배였다. 부결이 아니라 투표율이 25.7%에 그치며 정족수 미달에 따른 개표불가로 끝이 났다. 오 시장은 약속대로 시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고,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통해 10년 만에 서울시장으로 복귀했다.
현역 의원들의 투표로 정해지는 원내대표의 경우에도 재신임 문제가 거론되긴 했지만, 실제 투표로 이어진 사례는 없다. 의원총회에서 박수나 거수 등으로 재신임을 확인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