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돋보기] 칩 쌓을수록 '은'이 마른다…AI가 부른 귀금속의 변신

전도율·방열 '상용 금속 최고 수준'…AI 반도체 주요 소재로 부상
HBM 고단화·태양광 수요 맞물려 '산업용 은' 품귀 현상

최근 전세계에서 은(銀)이 금 가격의 변동과 맞물려 주목받고 있다.

통상 은은 경기 불확실성 국면에서 금과 묶여 '안전 자산'으로 대접받지만, 최근 가격 급변동은 단순히 '투자 심리'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사진=AFP연합뉴스

가격 하단을 떠받치는 건 다름 아닌 산업 현장의 '실수요'다.



인공지능(AI) 산업의 팽창이 은의 위상을 단순한 귀금속에서 전자·에너지 산업의 대체 불가능한 '전략 소재'로 바꿔놓고 있어서다.

우리가 생성형 AI에 질문을 던질 때마다 데이터센터 서버 속 반도체 패키지와 방열판 곳곳에서는 은이 전기 신호와 열을 나르는 '핏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 "구리보다 빠르고 차갑다"…AI 시대 재평가된 '은'

은이 AI 시대의 '슈퍼 금속'으로 부각되는 된 건 독보적인 물성 덕분이다.

은은 상용화된 금속 중 전기 전도율이 으뜸이다. 배선 소재의 대명사인 구리(Cu)보다도 국제 표준(IACS) 기준 전도율이 6~7%가량 높다.

전자의 이동을 도로 교통에 빗대자면 구리가 잘 닦인 국도일 때 은은 속도 제한이 없는 '아우토반'인 셈이다.

전기만 잘 통하는 게 아니다. 열전도율 역시 금속 중 최고 수준이다.

전력 소모가 막대한 고성능 AI 시스템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발열'인데, 은은 저항이 낮아 전력 손실을 줄이면서 열까지 빨리 식혀준다.

반도체 업계가 데이터 병목이나 열이 쏠리는 접합 구간에 은 함량을 높인 고전도 소재를 늘리는 이유다.

◇ HBM 적층 경쟁의 숨은 변수…'은'이 가른다

은의 진가는 한국 반도체 업계의 승부처인 고대역폭메모리(HBM) 공정에서 드러난다.

D램 칩을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HBM 구조상, 칩과 칩 사이를 전기적으로 잇는 수만 개의 '마이크로 범프(Micro Bump)'에는 주석-은(Sn-Ag) 합금 도금이 필수다. 적층 단수가 8단을 넘어 12단, 16단으로 높아지고 범프 크기가 머리카락보다 얇아질수록 접합 부위의 신뢰성을 담보하는 건 결국 정밀한 '은 제어 기술'이다.

엔비디아 등 빅테크가 요구하는 사양이 까다로워지면서 패키징 단계의 소재 혁신도 빨라졌다. 최근 현장에서 '은 소결(Silver Sintering)' 공정이 급부상한 배경이다.

기존에는 칩을 기판에 붙일 때 납이나 일반 솔더를 썼지만 이제는 은 입자를 반고체 상태로 뭉쳐 붙이는 방식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은 소결체는 내열성이 월등하고 열 저항이 낮아, 수백 와트(W)의 열을 뿜어내는 AI 가속기의 극한 환경을 버티기에 최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PC용 CPU와 달리 고가의 AI 서버용 칩은 미세한 온도 차이가 곧 수명과 직결된다"며 "비용 부담이 있어도 발열 제어가 시급한 구간에는 열전도율 끝판왕인 은 기반 소재를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 태양광이 깔고 AI가 얹었다…구조적 '미스매치'

문제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수급 미스매치'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은협회 집계를 보면 글로벌 은 시장은 2021년부터 수요 우위로 돌아서 지난해까지 공급 부족을 겪었고 올해도 마찬가지 상황일 것으로 관측된다.

산업용 은 수요에 불을 지핀 건 일차적으로 태양광이었다.

태양광 패널 전극용 은 페이스트 수요가 바닥을 다진 상태에서 전기차(EV), 5G 통신, AI 데이터센터 수요까지 겹치며 소비량이 역대급으로 치솟았다.

반면 은 공급은 대체로 막혀 있는 상황이다.

은은 전용 광산보다 구리·아연·납 등을 제련할 때 나오는 부산물 비중이 70%가 넘는다. 가격이 뛴다고 해서 당장 생산을 늘리기 어려운 구조다.

원자재 시장 전문가들은 "과거엔 은값이 오르면 차익 실현 매물이 나와 가격이 조정됐지만 지금은 태양광이나 AI처럼 줄이기 힘든 필수 산업재 수요가 버티고 있어 가격이 잘 안 내린다"고 진단했다.

AI 인프라 경쟁이 식지 않는 한, 은이 '귀한 산업재'로 대접받는 흐름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