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보요원들이 해외에서 벌이는 첩보전, 이데올로기가 인물에게 가하는 압박, 체제에 장기판 말처럼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는 인물들, 육탄전과 총격전, 총알 세례를 뚫고 질주하는 자동차….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11일 개봉)는 관객이 기대해온 ‘류승완표’ 장면으로 가득하다.
국정원 조 과장(조인성)과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 비리를 저지르는 북한 측 인사 황치성(박해준), 그사이에 끼인 여성 채선화(신세경)까지 캐릭터 구도는 류 감독의 13년 전 작품 ‘베를린’을 떠올리게 한다. 결말부에서 남북 요원이 협력해 빌런과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전개 역시 유사하다. 여기에 인신매매와 마약 등 동시대적 소재를 더해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류 감독 특유의 액션 ‘폼’을 유지하면서도, 이번 영화에는 이전 작품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멜로라는 변주가 더해졌다. 무엇보다 농도 짙은 로맨스가 영화의 중심을 이룬다. 박건은 옛 연인 선화를 향한 사랑에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건다. 그는 북한 안팎을 누비며 감찰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언제나 머릿속 한 귀퉁이에는 선화가 중력처럼 자리한다.
9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박정민은 “박건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것은 선화를 찾기 위해서만은 아니지만, 선화가 그곳에 흘러들어갔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자신의 해석을 들려줬다. 그는 “선화를 어떻게 찾아 구하고 지킬지에만 몰두하는 인물로 박건을 설정하고 연기했다”며 “선화와 함께하지 않는 장면에서도 모든 행동에 ‘선화’라는 키워드를 넣어 목적성을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박건이 국정원 요원 ‘임 대리’(정유진)와 국정원 안전가옥에서 벌이는 계단 낙하 장면, 눈 덮인 도로에서 펼치는 차량 총격전은 작품을 대표할 액션 장면으로 기억될 만하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은 박건의 첫 등장이다. 인신매매 브로커의 집에 숨어들어 어둠 속에서 얼굴에 절묘한 빛을 드리운 채 모습을 드러내는 ‘다트 장면’은 데뷔 15년을 넘긴 이 배우에게 이런 얼굴이 있었는지 새삼 놀라게 한다.
‘유독 잘생기게 나왔다’는 반응도 자연스럽다. 류 감독과 함께한 전작 ‘밀수’의 ‘장도리’ 역과 비교해 15~20kg을 감량하고 카메라 앞에 섰기 때문. 박정민은 “잘생겨 보여야 한다기보다 ‘박건처럼 보여야 한다’는 압박이 컸다”고 말했다. “군사훈련을 받고 떠돌며 작전을 수행하는 북한 요원이 잘 먹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 같았어요. 수척하고 선이 살아있는 얼굴을 만들고 싶었어요. 매 촬영 전 무조건 10㎞를 뛰며 부기를 뺐습니다.”
개봉 시점 역시 절묘하다. 지난해 말 가수 화사와 함께한 청룡영화제 시상식 무대로 ‘박정민 멜로’에 대한 수요가 높아진 차에 ‘휴민트’가 관객을 만난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는 대사로 보여준 사랑에 목숨 바치는 남자 이미지는 이번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멜로 수요’를 시의적절하게 끌어안는다.
그럼에도 그는 “어렸을 때는 배우 인생에 멜로 영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자신감도 없고, 제의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 화사와의 무대 영상 역시 한 번도 재생하지 않았다고 했다. “창피해서요. 제 알고리즘에 뜨긴 하지만 이를 악물고 안 봅니다. 신기루같이 금방 없어질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여전히 자신이 배우라는 직업을 가질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낀다. 출판사 무제 사무실에 출근해 일하는 일과도 여전하다. “많은 분이 저를 알아봐 주시지만, 제 일상은 크게 변한 게 없습니다. ‘운이 좋구나’ 하는 생각 정도예요. ‘대운’이 들어온 것 아니냐고요? ‘휴민트’가 잘되면 그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