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自然) …서로를 비추며 나란히 존재할 뿐 [신리사의 사랑으로 물든 미술]

그림자와 물, 한 장의 세계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의 비추는 자연

자연은 분석·점유할 대상 아닌
바라보고 관계 맺어야 할 존재
수많은 존재들이 서로 가로질러
형성된 질서이자 살아있는 과정
포용·연결·공존으로 상호 이해를

자연은 오랫동안 인간을 포함하는 하나의 거대한 질서로 이해되어 왔다. 인간의 삶과 활동은 자연의 일부였고, 자연은 외부의 대상이라기보다 세계가 작동하는 조건에 가까웠다. 하지만 근대 이후 자연은 점차 설명되고 관리되어야 할 대상으로 분리되며, 인공과 자연을 구분하는 개념적 경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자연은 환경으로 축소되어 인식되고, 그 과정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연결은 느슨해져 갔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은 어떠한가. 우리가 오르고 ‘정복’하며, 물고기를 길어 오르고, 커피를 손에 쥔 채 거니는 곳을 우리는 ‘자연’이라 부르지만, 대부분 인간의 손을 거쳐 조성된 장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자연(自然)’이란 단어를 다시 짚어본다면 그것은 세상이 ‘스스로 그러하게’ 작동하는 방식, 즉 수많은 존재가 서로를 가로지르며 형성된 질서이자 살아 있는 과정이다. 이제는 자연을 인공에 반대되는 상태나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 국한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형되는 존재의 방식으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① ‘산과 친구되기’(아뜰리에 에르메스, 2025) 설치 전경.

다층적 자연



스페인 출신의 예술가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1977년 출생)는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자연과 ‘친구 되기’를 선택한다.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진행되는 국내 첫 개인전 ‘산과 친구되기’(2025년 11월 28일∼2026년 3월 8일)에서 그는 자연을 분석이나 점유의 대상으로 삼는 대신, 서로 바라보고 관계 맺는 존재로 상정한다.

전시는 자연에 대한 이야기지만, 공업적 재료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자연을 감각과 반응, 연결이 교차하는 다층적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작가의 태도가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혼종적 감각은 LED 필라멘트 전구와 돌로 구성된 ‘번개치는 돌’ 연작에 담겨 있다. 작가는 돌의 생김새에 따라 ‘코끼리’, ‘사자’, ‘용’과 같은 부제를 붙인다.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품은 이 명명은 사물을 규정하거나 소유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연과 친해지기 위한 제스처에 가깝다. 이름은 대상을 고정하는 대신 관계의 문을 연다.

옆에 선 필라멘트 전구는 전시장 밖의 날씨에 반응하며 밝기를 달리한다. 외부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이 불안정한 빛은 안과 밖을 연결하며, 자연을 단일하고 고정된 실체가 아닌, 여러 조건이 겹쳐 작용하는 장으로 드러낸다.

만그라네가 기존의 자연관을 흔들기 위해 선택한 또 하나의 언어는 ‘기하학’이다. 그는 기하학을 인간의 이성적 사고의 트로피가 아니라, 자연에 이미 내재된 질서로 제시한다. ‘사마귀의 궁전’에서는 직선적인 사마귀의 형상과 구조물을 환영과도 같은 홀로그램으로 구현하여, 세계가 시선에 따라 다르게 드러난다는 점을 환기한다. ‘기하학적 자연’에서는 위태롭게 공중에 떠 있는 나뭇가지가 그림자 속에서 물성을 잃고 선의 형태로 환원되어 바닥에 드리워진다. 작가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 이미 자연에는 우리가 인간의 전유물이라 믿어온 기하학적 질서가 깃들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② ‘번개치는 돌(용)’, 상세컷, 2025, 돌과 LED 필라멘트 전구, 80 x 48 x 50cm, 240㎝.

달과 잎

‘물고기와 입맞추는 달’은 경주 월지의 수면에 비친 달을 담아낸 영상 작업이다. 그러나 화면 속 달은 명확한 형상이라기보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세포의 운동 같은 움직임으로 포착된다. 흔들리고 분해되는 일렁임은 우리가 달을 달이라고 부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화두를 던진다.

불교 경전인 ‘능엄경’에서는 ‘달을 보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見指忘月)’고 한다. 본질을 보지 않고 현상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한 것인데, 만그라네의 작품은 그 손가락이 가리킨 달만이 유일한 달이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한다. 연못에 비친 달은 하늘에 떠 있는 달보다 더 가까이 느껴질 수 있고, 깊은 사유를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 달이었다면 닿지 못했을 물고기에 입을 맞출 수도 있다. 따라서 화면 속의 달을 결핍된 ‘사본’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달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일정한 모습이나 원형으로 규정하고 판단하는 태도를 내려놓는 일에서 출발한다.

자연을 바라보는 만그라네의 시선은 한 장의 나뭇잎으로도 응축된다. ‘우아함과 체념’은 숲을 이루는 수많은 단위 중 하나인 잎사귀를 성물처럼 세워둔 작품이다.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나뭇잎의 표면은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 환하게 빛나기도, 검게 보이기도 한다. 구멍은 표면과 반전을 이루며 어두워지고 빛난다.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며 변이하는 나뭇잎의 속성은 관계와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사건으로 경험된다.

전시장 밖에 심어진 소나무 한 그루에 비하면 극히 미세한 일부에 불과하지만, 한 장의 잎은 숲과 동등한 밀도의 세계로 놓인다. 구멍 난 표면은 벌레의 흔적, 곧 그것을 먹고 살아가는 또 다른 존재를 암시하며 자연이 타자의 개입과 공존 속에서 성립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③ ‘우아함과 체념’, 2011, 마른 잎사귀(일본 고무나무 아종), 메탈 스탠드와 환등기, 가변크기. 사진 김상태ⓒ 에르메스 재단 제공

서로의 거울이 되어

자연에 대한 이야기들이 분주히 생산되고 있는 지금, 만그라네의 작업은 우리가 자연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잠시 멈추고 점검하게 한다.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외부를 향한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되돌아온다.

전시에서 자연은 직접 제기되기보다 반영되고, 매개되며, 관계 속에서 감지된다. 나뭇가지는 그림자로, 달은 물 위의 흔들림으로 드러나며, 필라멘트 빛은 안과 밖의 세계를 연결하고, 나뭇잎은 빛이 스며드는 세계가 된다. 이러한 ‘비춤’의 감각은 우리가 언제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공업적 재료와 기술의 사용은 자연을 인간의 개입 여부로 구분하는 사고를 유보시키고, 세계를 상호 침투하는 과정으로 제시한다. 자연을 포용과 연결, 공존의 감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인간과 자연, 환경에 대한 논의도 의미를 갖게 된다. 산과 ‘친구가 된다’는 말 역시 자연을 의인화하자는 제안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만이 유일한 주체라는 믿음을 내려놓고, 세계가 수많은 관점-서로 다른 움벨트-이 겹쳐 이루어져 있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만그라네가 펼쳐낸 자연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지도, 완전히 이해하지도 않는다. 서로를 비추며 나란히 존재할 뿐이다. 어쩌면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은, 그것이 ‘무엇’인지 묻기보다 ‘친구 되기’를 선택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