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라. 뭘 쓰면 좋을까. 소설가 이경란은 출판사로부터 창사 10주년 기념 앤솔로지에 실을 단편소설 원고 청탁을 받았다. 청탁은 그동안 출판사에서 소설을 출간했던 작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그가 이전에 이 출판사에서 장편소설 ‘디어 마이 송골매’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책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써달라는 것.
고민에 고민을 이어가다가, 책이란 책의 물성과 본질적 기능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책이라는 물성과 함께 문자 텍스트를 통해 동시대 또는 후대 사람들과 소통하는 본질적인 기능 역시 있다는 것을. 소설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책의 물성과 본질적인 기능을 동시에 다루는 이야기로, 더 나아가 물성으로서의 책에서 소통의 기능을 가진 텍스트로의 본질적 기능을 찾아가는 소설로.
“소설 속에서 화자인 ‘나’는 처음 책을 물성으로만 취급합니다. 책을 무시하기 위해 일부러 도배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도배 퍼포먼스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반응이나 카페 손님의 반응을 통해 소통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텍스트라는 본질적 기능을 찾아가게 되지요. 소설은 바로 여기에서 착안해 쓰게 된 것이지요. 요즘 사람들이 책을 너무 읽지 않고 있는데, 책의 본질에 대한 찬사나 추앙이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 마음을 담고 싶었지요.”
한국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도 깊은 문장으로 묘파해온 이경란 작가가 앤솔로지로 발표된 단편 ‘소년들은 자라서 어디로 가나’를 표제작으로 최근 발표한 단편 8편을 엮은 소설집(강·사진)을 펴냈다. 그의 세 번째 소설집.
이번 소설집에는 소년들이 자라서 도달한 지점, 그러니까 이제는 ‘K-아재들’이 된 모습이 다양하게 형상화돼 있다. 소년들이 “소외와 비애를 훈장처럼 달고 도착한 거리는 낡은 가부장제의 잔해와 자본주의의 비정한 영수증이 나뒹구는 춥고 어두운 뒷골목”이다. 작가는 바로 루저가 된 K-아재들의 모습을 재확인하는 한편, 그들의 몰락이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어떻게 한국 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이 됐는지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이경란은 왜 한국의 중년 남성, 이른바 K-아재들의 문제를 한국 사회의 그늘로 응시하게 됐을까. 그가 그리고 있는 K-아재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 작가를 지난 3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왜 K-아재들을 그린 작품들을 쓰게 된 것인가.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소설이라는 매체가 사람 사이의 소통을 도와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소설을 쓰면서 중년 남성들을 좀 이해하고 싶어서 쓰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더라. 알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알아야 하는 게 인간의 도리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작품을 쓰게 된 것 같다. 그런데 다 쓰고 나서는 작고한 남편을 이해하고 싶어서 이 소설들을 쓴 건가, 하고 뒤늦게 되짚어 보이는 측면도 있다.”
표제작 ‘소년들은 자라서 어디로 가나’는 해외에서 이십년을 떠돌다가 귀국해 아버지로부터 증여받은 낡은 단독주택을 카페로 개조해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와, 아버지가 쓴 것으로 보이는 남겨진 책 이야기가 따로 전개되다가 어느 순간 한 지점에 포개지면서 진한 여운을 남긴다. 나는 카페 이벤트로 남겨진 책의 낱장을 찢어 벽에 바르는 도배 퍼포먼스를 하지만, 책 내용에 흥미를 보이는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책에 흥미를 갖게 된다. 책을 통해 어긋난 사랑 때문에 실패한 아버지의 세계를 보게 되는데.
“빌어먹을. 책장을 구겨 휴지통에 버렸다. 잠시 후 꺼내 봤다가 잘게 찢어서 다시 버렸다. 영감은 끝까지 나를 엿 먹이는 중이었다. 영감의 시나리오는 어디까지일까? 어디까지 예상하고 유유히 실버타운 행을 택한 걸까?…. 손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마음이란 건 게임보다 책의 내용에, ‘호’와 ‘나’에게 자꾸 쏠렸다.”
―처음에는 소설 안의 책 내용에 관심 없다가 점점 책 속의 ‘나’와 ‘호’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는데.
“소설을 읽고 나면, 아버지가 ‘나’와 불화하게 된 원인도 아버지가 성소수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버지의 시대에 성소수자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참혹했겠나. 결국 결혼하게 되고, 결혼에서 실패하고, 아들과도 불화하게 된다. 아들은 외국으로 떠나버렸다가 나중에야 돌아오게 된다. 소설은 어떻게 보면 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아버지와 내가 화해로 가는 여정 같은 것이다. 결국 책이라는 것은 소통이 아닌가.”
소설집에는 중년 남성 백호종의 돌봄 노동을 다룬 단편인 ‘삐이유우우웅’과 ‘K-아재의 가자미근’, ‘소파인간 외출하다’ 세 편도 담겨 있다. ‘삐이유우우웅’은 백이 병원에 입원한 장모 준자씨를 간병하는 내용이고 ‘소파인간 외출하다’는 장모가 결국 요양원에 들어간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면, ‘K-아재의 가자미근’은 백이 병원에서 퇴원한 준자 씨의 집에서 돌봄 노동을 하는 내용을 그린다. 특히 ‘K-아재의 가자미근’은 돌봄 노동의 슬픈 숙명을 잘 보여주는 한편, 백이 우연히 냉장고에서 검은 봉투에 담겨진 지폐 다발을 발견하고 벌이는 웃픈 소동극을 담고 있다.
‘K-아재의 깨물근’에선 실직 상태로 아내 눈치 보기에 골머리를 썩이며 사둔 주식이 반 토막이 나는 바람에 무력감을 겪는 예순넷의 은퇴자 이탁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대학 동기 세 명과 함께 저녁을 먹고 노래방을 가려다가 집까지 팔아넘긴 친구를 보며 피할 수 없는 무력감과 소외를 느낀다.
―이 소설은 어떻게 왔는지.
“등단하기 전 남편에게 들은 이야기가 모티브가 됐다. 남편 친구들이 자꾸 외곽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는데, 왜 이사를 갔나 했더니, 집을 팔아 자식들을 결혼하는 데 보태주고 자신들은 외곽으로 빠진다는 것이었다. 부동산이 미쳐가지고 젊은이들은 집을 살 수도 없어 결국 부모들이 이렇게 해주는구나.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다 쓰고 난 뒤 알게 된 K-아재들의 모습은 어떤가.
“결국은 끝까지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웃음). 누구를 제대로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평생을 통해 잘 되지 않는 숙제 같은 것 같다. 그럼에도 알려고 하는 자세야말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1967년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경란은 2018년 단편소설 ‘오늘의 루프탑’이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장편소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 ‘디어 마이 송골매’를 발표했고, 소설집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 ‘사막과 럭비’ 등을 펴냈다.
―작가로서 비전이나 포부는.
“글을 쓰고 책을 계속 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우선 든다. 개인적으로 이야기의 진정성과 문학적 완성도 두 가지 모두를 달성한 작가로 기억되면 좋겠다. 내용도 좋고, 소설이라는 틀도 능수능란하게 잘 다루는 작가. 어쩌면 굉장한 욕심일 수 있다. 책이 많이 팔리는 것보다는 두 가지를 인정받으면 좋겠다. 그리고 책도 많이 팔리면 좋겠다(웃음).”
조금 늦게 일어나는 편인 그는 일정한 생활 루틴을 갖고 있지 않다. 지난해 생활에 변화가 너무 많기도 했고. 루틴을 잡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다. 경직된 일정으로 마음이 힘들어지고 쉽게 포기하게 되니까.
대신 생활의 중심을 읽고 쓰는 데 둔다. 틈날 때마다 어떻게든 쓰려고 노력한다. 보통 오후부터 초저녁까지, 컨디션이 가장 좋은 시간에 글을 쓴다. 작품을 쓸 때는 탁상 달력에 매일 목표 매수를 써놓는다. 상황이 어떠하든 목표 매수를 지키기 위해서다. 건강관리를 위해 산책도 자주 한다. 그리하여 소설가 이경란은 쓰고 또 쓴다. 천천히 뛰는 것 같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일반 사람이 100m를 전력 질주하는 속도로 42.19㎞를 뛰는 마라톤 선수처럼. 그의 옆에는 누추하고 비루한 K-아재도 함께 뛸지도.
“말하자면 비루하고 치사한 일이지만, 그에게도 남들 다 갖추고 사는 요령이 몇 개 장착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술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 일행 중 가장 늦게 출입문 쪽으로 가는 것이다. 요컨대 계산대 앞을 가장 늦게 지나치는 것…. 이런 각고의 노력으로 이탁은 어떻게든 승자가 될 수 있었지만 글쎄, 그걸 승자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겠다. 비루하다 해야 할까, 너절하다 해야 할까, 한마디로 상처뿐인 영광, 아니, 영광 없는 승리라고나 할까. 그만하면 어엿한 대한민국 제1의 아재라 할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