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프로미식축구리그(NFL) 결승전인 슈퍼볼 축하 공연 도중 스페인어 노래가 울려퍼진 데 따른 파문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 대한 모욕”이라며 불쾌감을 토로한 가운데 공화당 의원들도 속속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 반면 진보 진영은 “스페인어 공연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반(反)이민 정책을 꼬집은 것”이라며 옹호하고 나섰다.
10일(현지시간) 미 보도 전문 채널 MS NOW(옛 MSNBC)에 따르면 공화당 하원의원들 사이에 “의회가 슈퍼볼 축하 공연 전 과정을 조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랜디 파인(플로리다), 앤디 오글스(테네시), 마크 알포드(미주리) 등 하원의원들이 강경론을 주도하는 모양새다. 파인 의원은 해당 공연을 “불법”(illegal)으로 규정했으며, 알포드 의원은 “공화당 내부적으로 이미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논란은 지난 8일 캘리포니아주(州) 샌타클래라 리바이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슈퍼볼 시합 도중 하프타임 쇼 무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축하 공연에 나선 미국령 푸에르토리코 출신 가수 배드 버니(31)는 이달 초 그래미 시상식에서 비(非)영어권 가수로는 최초로 처음 ‘올해의 앨범상’을 받았을 만큼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버니는 노래를 부르기에 앞서 영어로 “신이여, 아메리카를 축복하소서”라고 말한 다음 느닷없이 중남미 국가들 이름을 죽 나열했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미국만 있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점을 강조한 셈이다.
이어 스페인어로 노래를 시작한 버니는 무대에 머문 13분 동안 영어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미국 스포츠의 상징으로 통하는 슈퍼볼에서 영어가 아닌 언어로 하프타임 쇼 공연을 소화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으로 대단한 파격이 아닐 수 없다. 뉴욕타임스(NYT) 등 진보 성향의 언론은 “라틴 문화권의 축제를 제대로 보여준 무대”라고 호평했다. 특히 영국 일간 가디언은 “버니는 스페인어 공연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을 꼬집으며 저항의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며 두둔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크게 분노했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관객 누구도 이 남자(버니)가 하는 말을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며 “미국에 대한 모욕”이라고 맹비난했다. 이어 “역대 최악의 슈퍼볼 공연 가운데 하나”라고 덧붙였다.
트럼프는 지난 2025년 1월 취임 직후 백악관 홈페이지를 개편하며 전임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엔 제공하던 스페인어 서비스를 없애 버렸다. 미국에서 스페인어가 영어 다음으로 널리 쓰이는 점을 애써 무시하며 ‘미국에서 살거나 미국에 관해 알고 싶으면 반드시 영어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풀이됐다.
오늘날 3억40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 인구 가운데 약 5분의 1이 히스패닉·라틴계 주민이다. 미국 내 스페인어 사용자들은 스페인어권 국가인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캘리포니아, 텍사스,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의 주에 특히 많이 산다. 버니의 고향인 푸에르토리코는 말할 것도 없다. 원래 스페인 식민지이던 섬이 19세기 말에야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미국령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물론 스페인어가 널리 쓰이는 곳에서 스페인어가 영어와 대등한 공용어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관공서 서류나 주민들에게 보내는 공문 등은 영어와 스페인어를 병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