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A씨는 최근 전 남자친구의 지독한 스토킹에 시달렸다. 문자메시지, 전화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스토킹 행위가 수십 차례 반복됐다. 스토킹처벌법상 접근 금지 조치가 내려졌는데도, 접근 금지 기간 동안 “자살하겠다”면서 협박하는 유서까지 보냈다. 사귀는 동안엔 욕설을 하며 자해할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A씨는 지난해 주민등록번호변경위원회를 통해 주민등록번호를 바꿨다. 스토킹 가해자가 구치소에서 출소하면 A씨를 찾아가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우려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유출된 주민번호 때문에 생명·신체 위해 또는 재산 피해를 입거나 그럴 우려가 있어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신청한 건수가 지난해 2000건을 넘어섰다. 2017년 제도가 도입된 이래 처음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정부가 주민번호 유출에 따른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주민등록 관련 제도적 보완책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1일 행정안전부 주민등록번호변경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위원회가 접수한 주민번호 변경 신청은 2235건에 달했다. 주민번호 변경 신청 건수는 제도 시행 첫해인 2017년 6∼12월 799건에서 2018년 560건, 2019년 641건 수준이었다가 2020년 1127건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난 뒤 매년 증가세다. 최근 5년 사이에 또 두 배 증가한 것이다.
실제 주민번호 변경은 신청 10건 중 6건꼴이다. 지난해까지 8년 7개월간 접수된 전체 신청 1만2181건 중 7794건(64.0%)이 인용됐다. 2955건은 기각, 53건은 각하됐다. 나머지 1134건은 취하됐고, 245건은 위원회 심의가 진행 중이다.
“신규 신용카드가 발급돼 배송 중이다.”
B씨가 받은 의문의 전화는 곧장 보이스피싱(전화 금융 사기) 일당에게 연결됐다. 금융감독원 직원과 검사를 사칭한 사기범은 “당신 명의 계좌가 금융 사기 범죄에 이용됐고, 공범 검거를 위해 보완 수사 중이다”, “피해자임을 입증하려면 자산 검수에 협조하라”는 그럴듯한 말로 B씨를 현혹했다. B씨는 결국 사기범에게 주민등록증 사본을 보내고 말았다. 이내 보이스피싱 일당은 B씨 명의로 알뜰폰과 인터넷 전화를 가입하고, B씨를 불러내 11억9400만원이란 거액을 편취했다.
◆변경 사유 보이스피싱, 사기·해킹 순
국민들이 주민번호 변경을 신청한 이유는 재산 피해가 대부분이다. 보이스피싱이 절반가량을 차지했다. 2017년 6월∼2025년 12월 기준 보이스피싱이 5940건으로 전체의 48.8%에 달했다. 사기·해킹 등은 2913건, 신분 도용은 1274건이다.
지난 한 해로 범위를 좁혀도 마찬가지다. 2235건의 신청 중 959건, 42.9%가 보이스피싱이다. 지난해 주민번호를 바꾼 C씨는 보이스피싱 일당에 1억6102만원을 편취당했다. “법원 등기를 직접 수령하지 않으면 반송되니, 알려 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고발 내용을 확인하라”는 말에 주민번호를 가짜 형사 사법 포털에 입력하고 말았다. 보이스피싱이 심각하다 보니 다른 신청 사유에 비해 인용률이 높다. 5940건 중 78.0%인 4632건이 인용됐다.
카카오톡 등 메신저를 통한 ‘메신저 피싱’, 문자메시지를 이용한 ‘스미싱’ 피해도 적지 않다. 지난해 D씨는 메신저 피싱으로 알뜰폰이 개통돼 1645만원이 계좌 이체 및 소액 결제되고 나서 주민번호를 바꿨다. 사기범이 아들을 사칭해 “휴대폰이 물에 빠져 번호가 바뀌었어”, “용돈을 보낼 테니 신분증과 계좌번호, 비밀번호가 필요해”라고 하자, 주민등록증 사본과 계좌·비밀 번호를 보낸 것이다.
지난해 주민번호를 바꾼 E씨는 ‘취업 화상 면접 안내’ 문자에 있던 링크를 눌렀다가 변을 당했다. 악성 앱이 설치돼 휴대전화에 저장돼 있던 주민등록증 사본, 계좌번호 등 개인정보가 털렸다. 10차례에 걸쳐 570만원이 해외로 송금되는 피해를 봤다.
불법 추심 업자의 횡포도 여전하다. F씨는 여러 불법 사금융 업자에게 대출을 받고 일부 상환했다. 업자의 과도한 이자 요구를 거부하자 욕설이 담긴 문자메시지가 쏟아졌다. 업자는 F씨의 주민번호가 기재된 차용증과 운전면허증을 지인들에게 유포하기까지 했다. F씨도 주민번호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최근엔 A씨처럼 스토킹 피해자들도 주민등록번호변경위 문을 두드린다. 이는 현행 주민등록법에 스토킹 피해자의 주민등록표 열람 또는 등·초본 교부를 제한하는 규정이 없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가정 폭력 피해자만 제한 신청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스토킹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한 소송을 제기해 “소송에 필요하다”며 피해자 주민등록표를 열람하거나 등·초본을 교부받아 피해자 주소를 알아내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위급 사안 경우 신청∼결정 45일 걸려
주민번호 변경 제도는 유출된 주민번호로 인해 생명·신체 위해 또는 재산 피해를 입거나 그럴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면 주민번호를 바꿔 주는 것이다. 주민번호 뒷자리 중 맨 앞의 성별을 제외한 임의 번호 6자리 변경이 가능하다. 헌법재판소가 2015년 “주민번호 변경을 허용하지 않는 건 개인정보 자기 결정권 침해”라며 주민등록법 7조에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법 개정을 거쳐 2017년 5월30일 시행됐다.
신청 대상자엔 아동·청소년 성범죄, 아동 학대, 가정 폭력, 성폭력, 성매매, 방화, 명예훼손, 모욕, 특정 강력 범죄의 피해자, 학교 폭력 피해 학생, 공익 및 특정 범죄 신고자도 포함된다. 개인정보 유출 통지서, 판결문 등 입증 자료를 갖춰 주민센터나 정부24에서 신청하면 위원회의 사실 조사와 심사를 거쳐 90일 이내에 변경 여부가 결정된다.
주민번호 변경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공공·행정 기관은 시스템 연계를 통해 주민번호가 자동 변경된다. 다만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여권 등 신분증은 재발급받아야 한다. 또 보험, 은행, 카드, 통신 등 민간 기관엔 새 신분증으로 직접 변경 신청을 해야 한다.
권헌영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주민번호 유출이 2차 피해로 연결된 사안을 추적해 제도적 대응 조치가 추가로 필요한지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회엔 스토킹, 성폭력 피해자 등도 주민등록표 열람 또는 등·초본 교부 제한 신청을 할 수 있게 하는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주민등록번호변경위 관계자는 “2024년 주민번호 변경 청구의 중대성과 시급성이 인정되는 사건의 심사·의결 기간을 90일에서 45일로 단축했다”며 “위원회는 주민번호 유출로 인한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2차 피해 예방을 위해 변경 업무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주민등록번호 변경 제도’란?
주민등록번호 유출로 생명·신체 위해 또는 재산 피해 입거나 입을 우려 있다고 인정되면 주민번호 13자리 중 생년월일과 성별 제외한 임의 번호 6자리 변경해 주는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