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받았던 도움, 이제 우리가 돌려줄 차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70년]

김상균 일미치과 원장

“14살 소녀의 입안에는 14개의 빈자리가 있었습니다.” 심각한 충치로 영구치 절반을 뽑아야 했던 캄보디아의 한 소녀. 이 참담한 풍경이 일미치과 김상균(사진) 원장을 오랜 세월 길 위에 머물게 했다. “가난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지 않게 하겠다”는 그의 결심은 10개국, 10만 명이라는 진료 기록으로 증명되고 있다. 이제 그는 진료라는 시혜에서 한 발 더 나가 현지 주민이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는 ‘자립’의 씨앗을 심고 있다.

김상균 일미치과 원장

“한국이 받았던 도움, 이제 우리가 돌려줄 차례”

김상균 원장은 해외 의료봉사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를 묻자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답했다.



“한국은 전쟁 이후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불과 수십 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로 성장했죠. 우리가 받은 도움을 다시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운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길을 함께 해 주었던 동료 의료진과 후원자들이 있었기에 40년 넘는 세월을 한결같이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의료봉사단은 코로나 시기 등 불가피한 공백을 제외하면 1970년대 중반부터 50년 가까이 활동을 이어왔다. 필리핀과 방글라데시를 시작으로 인도, 몽골, 태국 등 아시아를 넘어 파라과이와 브라질 같은 남미, 그리고 상투메 프린시페와 잠비아 등 아프리카 오지까지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 중심에서 김 원장이 본격적으로 해외 오지 진료에 매진해온 세월만 어느덧 40여 년. 연간 평균 3,000명 누적 환자 10만 명에 달하는 진료 기록은 그렇게 쌓였다. 이 기록의 마디마디에는 40년의 헌신이 지문처럼 새겨져 있다. 그는 “한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그 가족과 공동체를 살리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대학 시절 무의촌 봉사, 인생의 방향을 바꾸다

그의 첫 의료 봉사는 1975년 의대 1학년 시절이었다. 동아리 선배들을 따라 무의촌 의료봉사에 참여하면서 인생의 방향이 정해졌다.

“당시 일본 가정연합 의료봉사단이 한국 의대생들과 함께 전국을 돌며 한·일 합동 의료봉사를 했습니다. 일본 회원들이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화해의 마음으로 봉사한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죠. 의료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역사와 화해, 인간애를 잇는 다리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 경험은 이후 매년 봉사 현장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는 이를 “‘지구촌 한 가족’이라는 말을 실제로 체험한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언어 장벽 넘어선 공통 언어, ‘통증’

해외 현장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였다. 포르투갈어를 영어로, 다시 한국어로 옮기는 3단계 통역이 필요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아픔과 통증은 만국 공통어”라고 말한다.

“의료 기술로 고통을 줄여주면 언어가 달라도 마음은 통합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하루 다섯 번 기도 시간마다 진료를 멈춰야 했습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그들의 신앙을 존중하는 과정에서 문화적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14세 소녀와 메콩강의 보건소

수많은 기억 중 김 원장의 가슴에 가장 깊게 박힌 장면은 2010년 캄보디아 크라체주에서 만난 소녀의 모습이다. “그때 14세의 어린 나이에 14개의 영구치를 속절없이 잃어야 했던 한 소녀의 비극적인 사례를 계기로 치과 유니트, 콤프레샤, 소독기 등 치과 장비 일체를 한국에서 공수해 기증했습니다. 청소년 구강 보건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죠.”

또 하나의 기억은 메콩강 고립 섬에 보건소를 세운 일이다. 임산부나 응급 환자가 발생해도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변변찮아 생명을 잃을 수 있기에 3천 명이 사는 무의촌 지역에 2년간 모금 활동을 벌여 보건소를 설립했다. 현재도 한국과 일본 의료진이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운영을 돕고 있다.

아프리카에 병원과 의대를 세우는 꿈

그의 다음 목표는 분명하다. 아프리카에 병원을 세우고 의과대학을 설립하는 것이다.

“개화기 한국이 의료 선교를 통해 성장 동력을 얻었듯, 이제 우리가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일본의 2세대 의료인 네트워크 MESH와 한국 청년 의료인들이 이 비전에 동참하고 있다. 그는 “다음 세대가 이 길을 이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며 미소 지었다. 40년, 10만 명, 10개국.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그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붙든다.

“우리가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눌 수 있는가.”

의대생 시절 무의촌에서 품었던 이 질문의 답은 이제 메콩강의 보건소와 다시 웃게 된 소녀의 미소 속에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