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4위 아닌 역사…배기완 “차준환, 한국 남자 피겨 기준 됐다” [밀라노 현지 연결]

단체전의 흔들림, 밤샘 연습으로
김연아 이후 한국 피겨 지킨 시간
한국 남자 피겨의 좌표이자 역사로

우아한 몸짓으로 시작한 차준환의 연기는 끝까지 흐름을 놓지 않았다. 한 차례 흔들림이 있었지만 그는 곧 중심을 되찾았고, 프리 프로그램을 단단하게 마무리했다.

 

세 번째 올림픽 무대. 연기를 마친 그는 빙판 위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긴 여정이 막을 내렸다는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온 듯했다.

 

13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 스케이팅 아레나 경기장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 출전한 차준환 선수가 연기를 마치고 있다. 뉴시스

 

14일(한국시간) 2026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 남자 피겨 경기가 열린 밀라노 현지에서 중계를 마친 배기완 캐스터와 전화 연결이 닿았다. 배 캐스터는 중계석에서 지켜본 차준환의 경기 직후 모습에 대해 “결과는 4위였지만, 할 수 있는 건 다했다는 표정이었다”고 전했다.

 

경기 당일 중계석의 긴장감도 여전했다. 차준환은 프리에서 첫 점프인 쿼드러플 살코를 성공시키며 힘차게 출발했다. 그러나 두 번째 점프에서 착지가 흔들리며 넘어지자, 순간 링크의 공기가 달라졌다. 그럼에도 그는 중심을 되찾았고 이후 점프를 차분히 이어가며 프로그램을 완주했다.

 

배 캐스터는 “프리 프로그램에는 점프가 7개나 들어간다. 누구나 한번은 실수가 나올 수 있지만, 두 번째 실수가 나오면 긴장감은 훨씬 커진다”며 “그래도 차준환 선수는 다시 중심을 잡았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고맙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경기 종료 후 전광판에 찍힌 차준환의 순위는 4위(273.92점). 동메달을 따낸 일본의 사토 순(274.90점)과의 격차는 단 0.98점이었다.

 

배 캐스터는 “결과론이지만 쇼트에서 조금만 더 점수를 받았더라면 동메달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면서도 “하지만 판정은 심판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피겨스케이트 차준환이 10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 뉴시스

 

“매일 밤 마지막까지 남아 연습했다”

 

동메달과 1점도 되지 않는 차이 뒤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 있었다. 배 캐스터에 따르면, 차준환은 단체전에서 트리플 악셀을 실수한 뒤 대한체육회가 마련한 사설 링크장에서 밤늦게까지 점프 연습을 이어갔다.

 

그의 노력은 지난 11일 개인전 쇼트 프로그램에서 시즌 베스트 기록으로 이어졌다. 배 캐스터는 “쇼트는 분명 클린에 가까운 연기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미국이나 일본 같은 피겨 강국들은 오래전부터 사설 연습 링크를 활용해 왔다”며 “한국도 이번에 처음으로 연습 환경이 마련됐는데, 준비 과정이 분명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산시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개회식. 대한민국 기수인 피겨 차준환과 스피드스케이팅 박지우가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4위 아닌 ‘한국 남자 피겨의 새 역사’

 

배 캐스터는 이번 성적을 단순한 숫자로 보지 않았다. 그는 “올림픽에서 차준환 선수의 순위는 계속 올라갔다”면서 “2018년 평창 15위, 2022년 베이징 5위 그리고 밀라노 4위. 이제 한국 남자 피겨의 기준이 4위가 됐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성과”라고 평가했다.

 

밀라노 현지에서 체감한 위상도 달라져 있었다. 공항에는 차준환의 사인을 받으려는 현지 팬들이 몰려 있었다.

 

이번 올림픽에서 차준환은 한국 선수단의 ‘얼굴’이었다. 개회식 기수로 나서며 상징적인 역할도 맡았다. 배 캐스터는 “성적이 기대에 못 미치면 비판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그런 부담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다”며 “선수로서 충분히 역할을 해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배기완 캐스터가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남자 피겨 중계를 준비하고 있다. 배기완 캐스터 제공

 

20년 넘게 올림픽 중계를 이어온 배 캐스터에게 이번 무대는 또 다른 의미였다. 그는 1998년 나가노 올림픽부터 마이크를 잡았고, 2010년 밴쿠버에서 김연아의 금메달 순간을 전했다. “여왕이 돌아왔습니다”라는 명 멘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차준환의 세 번째 올림픽 여정을 곁에서 지켜봤다.

 

그는 차준환을 처음 본 순간도 기억하고 있었다. “2011년 김연아 선수의 ‘키스앤크라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스케이트를 타던 아이였다. 2018년 평창에서 다시 봤을 때 ‘많이 컸네’ 싶었다. 그때는 본선 24명에만 들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15위를 했고, 이후 베이징 5위, 밀라노 4위… 이제는 세계적인 선수다.”

 

김연아가 연 문, 닫히지 않게 버텨준 선수

 

‘피겨 여왕’ 김연아의 은퇴 이후 차준환은 한국 피겨의 공백기를 사실상 홀로 버텨왔다. 배 캐스터는 “다른 동계 인기 종목이 많은 상황에서도 ‘피겨’라는 이름이 쉽게 잊히지 않도록 중심을 지켜온 선수”라며 “김연아가 문을 열었다면, 차준환은 그 문이 닫히지 않도록 버텨준 선수”라고 평가했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남자 피겨는 두 장의 출전권을 확보했다. 김현겸이 추가 예선에서 직접 티켓을 따내며 가능해진 결과다. “이제는 차준환 혼자가 아니다. 누군가는 이번 4위를 보고 꿈을 꾸고, 또 누군가는 그 0.98점을 넘겠다고 도전할 것이다. 그렇게 한국 남자 피겨는 한 계단씩 올라갈 것이다.”

 

배 캐스터는 마지막으로 차준환을 향한 메시지를 남겼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앞으로도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