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타공인 세계최강이었지만, 2026년 밀라노에서 구겨져 가던 한국 쇼트트랙의 자존심을 다시 세워준 여자계주 금메달은 여자 대표팀이 ‘원팀’으로 똘똘 뭉쳤기에 가능했던 쾌거다. 그리고 쇼트트랙 여자 대표팀이 ‘원팀’으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은 에이스 최민정(성남시청)의 ‘대인배’적인 풍모 덕분이었다.
최민정과 김길리(성남시청), 노도희(화성시청), 심석희(서울시청)로 이뤄진 한국은 지난 19일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 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 결선에서 4분04초014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2018 평창에서 여자계주 금메달을 땄던 쇼트트랙 여자 대표팀은 2022 베이징에서 은메달에 만족해야했지만, 8년 만에 다시 금메달을 탈환하며 한국 쇼트트랙의 강함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여자계주 금메달에는 2018 평창에서는 한국 여자 쇼트트랙을 쌍끌이하던 ‘쌍두마차’였으나 이후 일련의 사건들로 어색한 관계가 됐던 최민정과 심석희의 의기투합이 있었다.
2021년, 심석희가 2018 평창 올림픽 당시 대표팀 코치와 나눈 메시지가 공개되면서 고의 충돌 의혹이 일었던 게 두 선수가 갈등을 빚게 된 주요 원인이었다. 메시지 중에는 ‘여자 브래드버리를 만들자’는 내용도 있었고, 이 한 줄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브래드버리는 호주 쇼트트랙 대표였던 스티븐 브래드버리로, 2002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최하위로 달리다 앞선 주자들이 모두 넘어지면서 어부지리로 금메달을 땄던 선수다. 실제로 심석희와 최민정은 2018 평창 여자 1000m 결승에서 충돌해 함께 넘어지면서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진짜 최민정의 금메달을 막기 위해 심석희가 일부러 넘어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심석희 본인도 부인했지만 최민정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충격이 됐다.
고의 충돌 의혹으로 자격정지를 받은 심석희가 2022 베이징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이후 대표팀에 복귀하면서 최민정과 심석희 사이에는 큰 벽이 있었다. 엉덩이 터치가 필수인 계주에서도 서로에게 몸이 닿는 것조차 싫어 순번을 떨어뜨려 놓아야만 했다. 최민정과 심석희의 갈등을 신경쓰면서 순번을 짜느라 여자계주의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 밀라노에서 쇼트트랙 대표팀 전체 주장을 맡은 최민정이 먼저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개인적인 감정을 접어두고 여자계주 금메달을 위해 순번을 붙이는 것에도 수용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열렸던 심석희의 생일 파티에 최민정도 참석해 축하하는 모습이 포착되며 100%는 아닐지라도 빙판 위에서만큼은 ‘원팀’이 되겠다는 시그널이었다.
최민정의 대인배적인 수용에 계주 순번도 달라졌다. 심석희가 4번, 최민정이 1번을 맡아 심석희가 최민정의 엉덩이를 힘껏 밀어줬다. 대표팀 내 최장신이자 가장 힘이 좋은 심석희가 대표팀 내에서 폭발력이 가장 뛰어난 최민정을 힘껏 밀어줘 가속을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결승에서 이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결승전 막판 3위를 달리던 상황. 자신의 레이스를 마친 심석희가 대기하고 있던 최민정을 힘껏 밀어줬고, 심석희의 강한 푸시에 힘을 받은 최민정은 폭발적으로 치고나가며 단숨에 캐나다 선수를 제치고 2위로 치고 나갔다. 이날 경기의 최고 하이라이트였다. 서로 몸에 닿는 것도 꺼렸던 두 사람이 오로지 여자계주 금메달이라는 대승적인 목표를 위해 완벽하게 결합했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여자계주의 금메달에는 마지막 주자로 이탈리아의 아리아나 폰타나를 제친 김길리의 공도 크지만, 가장 큰 공은 최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민정이 마음을 열지 않았다면 여자 대표팀은 ‘원팀’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선수들이 많은 한국 쇼트트랙에서도 역대 최고의 여자 선수로 꼽히는 최민정. 그는 기량뿐만 아니라 인성과 성품, 대인배적인 풍모까지도 역대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