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밤 9시, 서울 성북구의 한 분식집. 야근을 마친 직장인 이모(34) 씨가 라면 뚜껑을 열자 하얀 김이 안경을 뿌옇게 가린다. “후루룩” 면치기 소리와 함께 국물까지 시원하게 들이키는 4분은 고된 하루를 보상받는 시간이다.
잘 익은 김치 한 점을 올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비워낸 뒤에야 포만감과 안도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이 달콤한 위로 뒤에는 우리 몸의 ‘필터’인 콩팥이 감내해야 할 부담이 쌓일 가능성도 있다.
◆혈압 키우는 식탁…보이지 않는 부담
국내 성인의 혈관 건강에는 이미 경고등이 켜져 있다. 질병관리청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국내 30세 이상 성인 약 27%가 고혈압을 앓고 있다. 60대 이상으로 가면 두 명 중 한 명이 고혈압 분류군에 속한다.
국가데이터처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고혈압성 질환 관련 사망은 최근 10년간 증감을 반복해 왔다. 짠맛에 길들여진 식습관은 혈압을 높여 혈관에 부담을 주고, 이는 장기적으로 콩팥 기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신장내과 전문의는 “라면 국물을 끝까지 마시는 습관은 매번 상당량의 염분을 체내에 투여하는 것과 같다”며 “젊을 때는 신체 항상성으로 버틸 수 있지만, 이러한 습관이 10~20년 누적되면 콩팥 기능 저하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WHO 권고량 2000mg…‘4분의 보상’의 수치
식품의약품안전처 자료에 따르면 일반적인 컵라면 한 용기의 나트륨 함량은 평균 1700~1800mg 수준이다. 여기에 편의점용 볶음김치(약 300~500mg)를 곁들이면 총 섭취량은 2000mg에 근접하거나 이를 넘을 가능성도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권고하는 성인 하루 나트륨 섭취 제한량은 2000mg이다. 라면 한 그릇을 국물까지 비울 경우 한 끼 만에 대부분을 채우거나 초과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칼국수(약 1200mg 안팎)나 짬뽕의 경우 제품·조리 방식에 따라 4000mg 안팎에 이를 수 있다. 특히 라면은 조리가 간편하고 국물까지 모두 마시는 빈도가 높아 나트륨 과다 섭취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국물 절반 남기기…가장 현실적인 절제
전문가들은 식단을 한 번에 바꾸기 어렵다면 ‘국물 남기기’부터 실천하라고 조언한다. 국물을 절반만 남겨도 제품에 따라 수백 mg 수준의 나트륨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병원 영양팀 관계자는 “면만 따로 삶아 옮겨 담거나, 국물에 밥을 말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트륨 섭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물을 마실 때 숟가락 대신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된다.
결국 짠맛에 익숙해진 미각을 되돌리는 일은 거창한 식단 혁명보다 작은 절제에서 시작된다. 오늘 밤 라면 용기를 든 손을 잠시 멈춰보자. 빈 라면 용기 바닥에 찰랑이는 붉은 국물 앞, 숟가락을 조용히 내려놓는 2분의 망설임이 10년 뒤 내 콩팥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처방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