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처럼 펼쳐지는 사랑과 욕망…

뮤지컬 ‘몽유도원’ 리뷰

최인호 소설 ‘몽유도원도’ 원작
삼국사기 ‘도미전’ 설화 무대화
죽음도 뛰어 넘는 부부의 믿음
헛된 꿈 인한 파국과 파멸 그려

전통음악·서양 오케스트라 결합
창작 뮤지컬에 ‘정가’ 결합시켜
수묵화 같은 무대미술도 환상적
2028년 세계시장 겨냥 수준작

서사·인물의 밀도 더 채워지면
K뮤지컬의 새로운 이정표 기대

“도미는 백제 사람이다.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절개가 있었다(都彌者 百濟人也/妻美而有節).”

강렬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사랑 이야기가 있다. 삼국사기 열전에 사오백자 한문으로 기록된 도미 부부 설화다. 이들의 지극한 사랑과 남의 아내를 탐한 백제 개로왕 여경의 욕망이 뮤지컬 무대에서 되살아났다. 고구려 장수왕에게 쓰러진 개로왕 재위 연도가 455∼475년이니 1500여년 전 이야기다.

움직이는 수묵화 같은 무대와 화려한 춤·의상, 한국 전통음악과 서양 오케스트라가 결합된 27곡의 넘버 그리고 정련된 노래로 열연하는 배우들이 한국 창작 뮤지컬의 또 다른 성취를 보여준 뮤지컬 ‘몽유도원’. 에이콤 제공

뮤지컬 ‘몽유도원’이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1월27일 개막해 2월22일 막을 내렸다. 최인호 작가 소설 ‘몽유도원도’가 원작이다. 뮤지컬 ‘명성황후’와 ‘영웅’ 제작사 에이콤이 2002년 ‘몽유도원도’라는 제목으로 초연한 작품을 거의 새로 만들다시피 해서 24년 만에 무대에 올렸다. 윤호진 연출, 안재승 극작, 오상준 작곡, 김문정 음악감독 등 제작진이 화려하다. 움직이는 수묵화 같은 무대와 화려한 춤·의상, 한국 전통음악과 서양 오케스트라가 결합된 27곡의 넘버 그리고 정련된 노래로 열연하는 배우들이 한국 창작 뮤지컬의 또 다른 성취를 보여줬다. 제작사는 ‘한국적 미학과 보편적 공감으로 세계 시장을 두드릴 차세대 창작 뮤지컬’을 자임하며 2028년 브로드웨이 진출을 예고했다.



극을 추동하는 건 백제 왕 여경이다. 용상에 앉아 꾼 꿈에서 “억겁을 통해 사랑해 온 여인”을 만난 여경은 화공을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한 후 전국을 수소문해 그림과 똑같은 여인을 찾는다. 왕위를 지키기 위해 사랑이라는 감정마저 지운 채 살아왔지만 꿈속에서 아랑을 본 후 자신과 왕국까지 불태우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인물이다. 뮤지컬계 에이스 민우혁과 바리톤 성악가 출신 김주택이 더블 캐스팅됐는데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와 노래를 보여줬다.

절대권력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아름다움을 지워 맞서는 여인 아랑에는 유리아와 하윤주가 출연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이수자로서 선비들의 노래인 ‘정가(正歌)’의 여신이란 애칭까지 가진 하윤주는 특유의 창법으로 이 작품에 독특한 매력을 더했다. 관객 다수에겐 낯선 구음(口音)으로 객석을 순식간에 매료하면서 꿈속 여인 아랑의 신비로움을 극대화한 것. 창작 뮤지컬 영역에 정가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여기에 명창 정은혜도 달을 신으로 섬기며 삶과 죽음에 대한 제의를 주관하는 제사장 ‘비아’로 등장하며 이 작품이 지향하는 목표를 뚜렷하게 드러냈다. 오랫동안 절차탁마한 소리꾼만이 낼 수 있는 창법으로 도미와 아랑의 혼례를 주관하고 고혼(孤魂)을 달래는 진혼굿까지 끌어내며 극 전체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날짜를 잘 고르면 오디션 프로그램 팬텀싱어에서 스타가 된 바리톤과 손꼽히는 명창 그리고 정가여신이 한 무대에서 만들어내는 특별한 하모니를 감상할 수도 있다.

한국적 미학을 추구하는 작품답게 발광다이오드(LED) 화면 위에서 살아 움직인 수묵 애니메이션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모셔널씨어터가 설계한 무대와 조명 그리고 탁영환 작가가 한지와 수묵으로 제작한 영상이 무대 전체를 채웠다. 눈을 잃은 도미가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흘러가는 장면은 그야말로 움직이는 산수화다.

극 전개에서 나룻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도미를 떠나보내고 다시 아랑이 도미를 찾아가고, 마지막엔 두 사람이 몽유도원으로 향해 나가는 장면까지 서사의 핵심 동선을 만들어낸다.

또 다른 인상적 장면은 바둑 대결이다. 흑백의 세를 다투는 바둑판이 희고 검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의 합을 겨루는 듯한 군무로 표현된다. 영화 ‘황산벌’(2003)에서 선보였던 인간 장기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이처럼 빼곡하게 채운 무대였지만 주인공의 입체성 부족은 아쉬운 점이다. 여경, 도미·아랑 모두 ‘무력한 연인’과 ‘욕망에 눈먼 권력자’라는 처음부터 정해진 전통적 서사를 벗어나지 못한다. 1부 마지막은 바둑 대결에서 진 도미와 여경 앞으로 아랑이 끌려오고 도미가 눈을 잃은 채 쫓겨나는 결정적 장면이다. 그런데 무대 위 감정의 소용돌이가 객석에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극 중에선 채홍사 역할을 하다가 아랑을 풀어주고 여경에게 죽임을 당하는 신하 향실이 입체적 인물이나 자연스럽진 않다. 소설에선 간신인데 무대에선 너무 서둘러 충신으로 바꾼 듯하다. 해수와 진림으로 대표되는 귀족 간 권력 다툼이라는 설정도 여경의 불안과 고립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됐으나 극 전체의 긴장을 끌어올리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무대 미술과 음악이 세계 시장을 겨냥한 수준작이니 그 그릇에 담긴 서사와 인물 밀도만 더 채워진다면 한국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수 있다.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4월11일부터 5월1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