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면 3년 내 우리나라 석유화학 핵심 자산에서 최대 37조3000억원 상당의 좌초자산이 발생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좌초자산은 시장 환경이나 규제 변화 등 외부 요인으로 가치를 상실해 부채가 되는 자산을 말한다. 이 분석은 파리협정이 정한 ‘1.5도 목표’를 고려할 때 남은 탄소 배출 가능량(탄소예산)을 반영한 것이다.
최근 장기 불황에 빠진 국내 석유화학 업계에 대한 정부 주도 구조조정이 본격화한 가운데 그 ‘1호 사례’ 확정이 임박한 상황이다. 분석을 진행한 연구진은 “현재 진행 중인 구조조정은 시장 수익성 기준으로만 설계돼 있다”며 “시장 위기를 넘기더라도 탄소 위기로 설비를 폐쇄하는 2중 구조조정을 맞닥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22일 비영리 에너지 정책 연구기관 ‘플랜잇’(PLANiT)이 국내 석유화학 생산시설 243개(에쓰오일 샤힌 프로젝트 추가 기설 6개 포함) 대상으로 1.5도 탄소예산 경로를 적용해 좌초자산 발생 시점을 분석한 결과, 오는 2029년이나 2030년에 석유화학단지 핵심 시설인 나프타분해시설(NCC) 자산이 처음으로 좌초 위험에 노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NCC를 전기 가열 기술로 전환하는 시나리오대로라면 2029년 37조3000억원, 수소 기반 기술로 바꾼다고 가정하면 2030년 35조원 규모의 좌초자산이 발생한단 것이다. 현 수준의 NCC를 새로 짓는 비용(138조7000억∼144조7000억원) 기준으로 25% 정도가 자산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셈이다.
NCC는 화석연료를 원료이자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 이런 사정으로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약 5270만tCO₂eq(이산화탄소 환산톤)이고 국가 전체 배출량의 약 8%, 산업 부문의 21%를 차지한다.
탄소중립을 위해 NCC를 대체할 기술로 검토되는 게 전기 가열 기술과 수소 기반 기술이다. 이번 분석에선 전기 가열 기술의 경우 예상 상용화 시점인 2020년대 후반, 수소 기반 기술은 2030년 이후 단계적으로 도입된다고 가정했다.
기업별로 예상 좌초자산을 따져보면, 수소 기반 기술 전환을 전제로 할 때 가장 규모가 큰 기업은 9조원에 달했다. 업계 전체 좌초자산 규모의 25% 정도에 달하는 수준이다. 이 기업은 대규모 신규 시설의 장부 가치가 높기 때문에 좌초자산 규모도 클 수밖에 없었다.
이번 좌초자산 분석에는 현재 정부 주도로 진행 중인 구조조정 결과가 사전에 반영되진 않았다. 조만간 구조조정 1호 사례로 전망되는 HD현대와 롯데케미칼의 대산 석유화학단지 NCC 통폐합 계획이 확정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다. 국내 석유화학 업계는 자율 협약을 통해 총 270만∼370만t(전체 생산능력의 18∼25%) 규모 구조조정을 약속한 바 있다.
업계에선 1호 사례가 확정되면 구조조정에 속도가 붙어 좌초자산 규모도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 관계자는 “구조조정을 통해서 자연스레 탄소 배출 주범으로 꼽히는 NCC 설비를 많이 줄일 계획”이라며 “다만 이는 탄소예산을 고려해서가 아니고, NCC로 생산하는 에틸렌, 프로필렌 등 일반 석유화학제품 자체가 중동·중국에 밀려 수익성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탄소예산에 대한 고려 없이 수익성만 따져 이번에 구조조정을 할 경우 추후에 ‘2중 구조조정’ 위기에 빠질 수 있단 게 플랜잇 측 지적이다.
박진수 플랜잇 대표는 보고서에서 “시장 수익성만 고려해 특정 NCC를 존속시키더라도 탄소예산이 소진되면 그 설비는 다시 폐쇄 압력에 직면한다”며 “구조조정 대상을 선별할 때 에너지 전환 가능성을 동시에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석유화학 업계는 이런 좌초자산 부담뿐 아니라 탈탄소 전환에도 막대한 비용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다. 연구진은 이 비용이 우리 정부의 ‘에너지 정책’ 방향에 따라 최대 547조원까지 격차가 벌어질 수 있단 전망도 내놨다. 전체 전환 비용의 93~98%가 에너지(전력) 구매비용이고, 신규 설비 투자와 운영비는 2~7%에 불과한 사정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수소 기반 기술로 전환하는 경우, 전력 가격이 오르지 않고 수소 가격이 전력 가격과 연동되지 않았다고 가정할 때 전환 비용은 214조원 수준으로 책정됐다. 반면 전력 가격이 현행 기준 ㎾h당 130원에서 2050년 239원까지 상승하고 수소 가격이 전력 가격과 연동되는 경우 전환 비용은 761조원까지 급증했다.
수소 기반 기술 대신 전기 가열 기술로 전환하는 경우에는, 전격 가격이 마찬가지로 상승할 때 전환 비용이 514조원으로 계산됐다. 전력 가격이 현행 수준을 유지할 때(217조원)보다 약 2.4배 많았다.
박 대표는 “석유화학 탈탄소 전환은 ‘얼마나 많은 설비를 지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조건으로 에너지를 조달할 것인가’의 문제”라며 “석유화학 산업의 경제적·환경적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선 전력 가격 안정화와 수소 공급 다변화 논의가 시급하다”고 했다.
업계에서도 정부 에너지 정책의 중요성에 대해 공감을 표했다. 한 관계자는 “전기 가열 기술과 수소 기반 기술 도입 등 탄소배출 절감 노력을 이어가고 있지만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라며 “정부가 산업용 전기요금을 안정적으로 관리한다면 관련 기술 도입도 보다 탄력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