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를 가르는 경매사의 호각 소리가 날카롭다. 경북의 한 농수산물도매시장 경매장, 짙은 초록빛 샤인머스켓 상자들이 끝도 없이 밀려든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2만~3만원대를 기록하던 상자 가격은 이제 평균 5000원 선에 머문다. 한때 농가의 ‘로또’로 불리던 열매가 깊은 한숨으로 돌아온 순간이다.
◆81.3% 급락…프리미엄 흔들리다
안동청과가 공개한 이달 13일 일일시세표에 따르면 샤인머스켓 2㎏ ‘특’ 등급 평균 경락가는 5451원이다. 최고 6800원, 최저 2600원까지 밀렸다.
이는 2022년 2월 10일 평균가 2만9100원과 비교하면 약 81.3% 하락한 수치다. 2021년 평균가 2만3854원과 비교해도 약 77% 떨어졌다. 가격 하락 폭이 4년 새 80% 안팎에 달하면서 프리미엄 지위가 크게 흔들렸음을 뜻한다.
◆단일 품종의 쏠림…경북 59%가 샤인
경북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경북 포도 재배면적은 8206㏊로 전국의 56%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59%(4829㏊)가 샤인머스켓이다.
경북산 포도 수출 물량의 약 90%도 샤인머스켓에 집중돼 있다. 한 품종에 쏠린 구조는 상승기엔 효율적이지만, 하락기엔 가격 변동성을 키운다.
김천에서 15년째 포도를 재배하는 한 농민은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지니 가격 방어가 어렵다”며 “품종 분산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라고 말했다.
◆대체 아닌 분산…‘글로리스타’ 통할까
이런 위기 속에서 경북농업기술원이 적색 신품종 ‘글로리스타’ 보급에 속도를 내고 있다. 샤인머스켓 집중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한 전략이다.
글로리스타는 10월 상순 수확하는 만생종으로 씨가 없고 껍질째 먹을 수 있다. 아삭한 식감과 높은 당도를 갖춘 것이 특징이다.
수출 흐름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25년 포도 수출액은 8470만달러(잠정)로 2024년 대비 46.3% 증가했다.
최대 시장은 대만(4400만달러)이며 싱가포르·태국 등 동남아 시장도 확대되는 추세다. 현지 유통업계에서는 붉은색 과일 선호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기후 변수…‘착색 안정성’이 경쟁력
기후도 변수다. 농촌진흥청은 과수류가 성숙기 고온 환경에 놓일 경우 착색 불량 등 품질 저하가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최근 여름철 고온 현상이 반복되면서 착색 안정성은 품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떠올랐다.
경매가 끝난 뒤 텅 빈 파렛트를 정리하던 한 농민은 말했다. “품종을 바꾸는 건 모험이지만, 그대로 있는 건 더 큰 모험입니다.”
상자 위에 찍힌 5451원이라는 숫자. 이는 단순한 가격표를 넘어, 단일 품종의 한계를 벗어나야 생존할 수 있다는 한국 포도 산업의 매서운 경고장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