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우연이지만 성취는 노력의 결과였다. 전 봅슬레이 국가대표 원윤종(41)이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고 한국인 세 번째이자 동계 종목 최초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에 선출된 과정이 이를 보여준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이 보여준 투혼은 뜨거운 감동을 남겼지만 스포츠 외교전에서도 한국은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김재열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회장이 이번 올림픽 개막 직전 열린 총회에서 IOC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된 데 이어, 대회 막바지였던 지난 19일에는 IOC 선수위원에 출마한 원윤종 후보가 11명의 후보 가운데 최다 득표를 기록하며 2명의 당선자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원윤종 위원이 올림픽 폐회식에서 당당히 8년 임기의 새 IOC 선수위원으로 소개되면서 김재열 위원 단 1명이었던 한국인 IOC 위원이 2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우연한 기회에 승선하게 된 봅슬레이 썰매를 타고 IOC 선수위원까지 질주한 원윤종의 도전기를 앞으로의 계획을 올림픽이 열렸던 밀라노에서 직접 들어봤다.
◆포스터 하나가 바꾼 인생
◆올림픽 은메달의 영광
그렇게 국가대표가 된 원윤종은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 출전해 18위에 오르며 올림피언이 된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정식 트랙이 없어 평창에 있는 스타트 훈련장 등 아스팔트에서 훈련하던 때”였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다 보니 국가대표 훈련수당으로 받는 70만~80만원으로 생활하고, 대표 소집 훈련이 없을 때는 체대입시 강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막노동도 여러 번 해봤다”고 밝혔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2016년 정식 트랙이 만들어지는 등 환경이 조금씩 나아지자 2015∼2016시즌에는 서영우와 함께 2인승 세계랭킹 1위까지 올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원윤종은 “당시 유럽 선수들이 어떻게 훈련 환경도 좋지 않은데 좋은 성적을 내느냐고 신기해하는 것을 보고 뿌듯했다”고 인터뷰했을 정도다. 당연히 안방에서 열리는 2018 평창 올림픽 메달 기대주로 떠올랐다. 하지만 기대했던 2인승에서 노메달에 그치며 ‘이변’의 희생자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원윤종은 4인승 종목에서 일을 냈다. 김동현, 서영우, 전정린과 함께 호흡을 맞춰 한국 최초는 물론 아시아 최초로 이 종목 은메달을 목에 건 것이다. 은메달을 딴 직후 원윤종은 “상상 속에서만 이뤄지던 일이 벌어졌다. 꿈만 같다”고 감격해 했다. 무엇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힘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믿고 우직하게 나가다 보면 언젠가 그 결실을 볼 때가 올 것 같다”고 했던 대회 전 약속을 지킨 것이 기뻤다.
◆새로운 도전 IOC 선수위원
2022년 베이징 올림픽에도 출전했던 원윤종은 두 번째 메달 획득에 실패했지만 후배들의 성장을 바라보며 이제 현역 선수생활을 접었다. 지도자의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은퇴 이후 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IBSF) 선수위원회를 맡는 등 행정가로서 경험과 역량을 쌓았다.
원윤종은 “늘 좋은 영향을 받는 게 중요하다. 평창 올림픽 당시 선수로 경기에만 집중하고 다른 것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는데 외적으로 단 하나 보인 게 당시 IOC 선수위원으로 활동한 유승민 체육회장”이라며 “IOC 관계자 등과 소통하며 굉장히 열심히 일하시는 걸 보면서 ‘아 이런 길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며 행정가의 길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밝혔다.
이렇게 국제무대로 활동반경을 넓히다 보니 내심 원윤종은 IOC 선수위원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에 생각이 미치게 됐고 과감하게 국내 후보 선출에 도전한다. 그리고 피겨스케이팅 간판 차준환(서울시청)과 함께 최종 2인 후보에 올랐다. 영어와 인지도 면에서는 차준환이 앞서 있었지만 원윤종은 봅슬레이에 도전할 때처럼 우직하게 자신의 강점을 강조했다. 원윤종은 “최종 면접 당시 올림픽 무대에서 메달을 목에 걸어봤고, 선수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봅슬레이 선수위원)도 맡아봐 경험에서 앞선다고 생각했다”면서 “현역이 아닌 은퇴 선수이기에 올림픽 기간 중 선거운동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다는 것도 강조했다”고 밝혔다.
◆선수들의 심장을 울린 ‘진심의 선거전’
원윤종은 IOC 선수위원 후보 선정 최종 면접을 당당하게 통과하며 한국 후보로 뽑혔고 IOC의 최종 후보 11명에도 들어갔다. 차준환의 몫까지 열심히 선거운동을 해서 당선돼야 한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가장 먼저 선수위원 선거에서 당선 경험자인 유승민 체육회장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유 회장도 “내가 당선될 때 했던 모든 노하우를 다 알려줬다”고 밝히기도 했다. 원윤종은 “회장님이 하루 3만보 이상 걸으셨다는데, 저도 비슷한 느낌으로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선수, 봉사자, 직원 가리지 않고 소통했다. 이후엔 모두가 저를 알아보더라. 진정성으로 다가갔다”고 밝혔다.
실제 그는 운동화 두 켤레와 눈밭을 걸을 수 있는 방수 부츠 한 켤레 등 신발만 세 켤레를 준비해 6개 클러스터에 흩어져 있는 선수촌을 돌며 매일 15시간씩 선수들에게 다가갔다. “사실 선수촌이 분산돼 있어 규모가 작아서 생각보다 많이 걷지는 못했다. 대신 한자리에 오래 서서 선거운동을 하다 보니 무릎과 허리가 많이 아팠다”며 웃었다.
이러자 선수들이 먼저 다가왔다. 추운 곳에 서서 고생한다며 커피를 주고 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하루 다섯 잔 정도 커피를 마신 것 같다. 세 잔은 선수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이 주는 것이었고 두 잔은 졸음을 이기기 위해 내가 찾아 마셨다”고 말했다.
선거운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한 여자 선수와 대화였다. 원윤종은 “아기가 있는 엄마 선수가 다가와 올림픽 기간 아이를 돌볼 공간이 없어 아이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고충을 토로했다”면서 “그래서 내가 파리 하계올림픽만 해도 그런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번 대회는 어떤 문제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내가 당선되든 안 되든 그 부분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전달하겠다고 답했던 장면이 인상 깊게 남았다”고 떠올렸다.
이렇게 진정성 있게 다가간 원윤종에게 선수들은 표로 화답했고 원윤종은 당당하게 전체 1위로 IOC 선수위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당선 다음 날인 지난 20일 커스티 코번트리 IOC 위원장과의 조찬을 했고, 선수위원 미팅도 처음으로 참석했다. 원윤종은 “선수위원이 된 게 실감이 되는 순간이었다”며 미소지었다.
◆“선수의 대변자가 되겠다”
이제 IOC 위원이 된 원윤종은 무엇보다 선수를 대표해 뽑힌 것이기에 선수들의 대변자로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그는 “동계 종목 최초 IOC 선수위원이 됐기에 아무래도 하계보다 열악한 동계 선수들의 환경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고 운을 뗀다. “그렇지만 모든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귀를 열어 놓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스포츠 외교의 중심에 선 원윤종에게 이번 올림픽에서 대두한 첨예한 문제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당장 전쟁 희생자 ‘추모 헬멧’을 쓰고 스켈레톤 경기에 나서려다 출전 금지된 블라디슬라프 헤라스케비치(우크라이나)에 대한 입장을 묻자 원윤종은 “선수의 대표자로서 선수의 목소리를 IOC에 전달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다음 최종 결정은 IOC의 규약과 프로세스에 의해 나오겠지만 내 역할은 선수와 IOC 행정부 간의 브리지 역할이니까 일단 선수의 목소리 전달에 애쓰겠다”고 답했다.
또한 이번 한국 김상겸(하이원)이 은메달을 딴 스노보드 평행대회전 등 몇몇 종목을 동계올림픽에서 제외하는 것을 검토하겠다는 IOC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원윤종은 “해당 선수들은 이렇게 재미있는 종목을 왜 올림픽에서 빼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그 목소리도 열심히 IOC에 전달할 생각이다. 선수위원은 철저히 선수들의 대변자가 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멈추지 않는 파일럿, 그의 길은 현재진행형
봅슬레이 선수로서 원윤종의 역할은 썰매 제일 앞에서 방향타를 조정하는 파일럿이었다. 팀의 리더이자 조타수로서 역할이다. 이제 그는 IOC 선수위원으로서 전 세계 올림픽 출전 선수들의 선봉에 서 있게 됐다.
이런 그의 큰 관심사는 동계 스포츠의 지역적 불균형 해소다. 유럽과 북미 중심인 동계 스포츠의 저변을 아시아와 제3세계로 확대하고 싶다는 포부다. 원윤종은 “그런 지역 청소년들을 지원해 최종적으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가 될 수 있게끔 지원하고 싶다. 여러 국가가 다양한 종목에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게끔 돕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8년의 IOC 선수위원 임기를 마친 뒤 그는 어떤 말을 듣고 싶을까. 한참을 생각하던 원윤종은 “8년 뒤는 아직 먼 얘기이긴 하지만 선수들에게서 ‘대표자를 잘 뽑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좋겠다. 제게 믿음을 준 만큼 보답할 수 있는 활동을 펼치고 싶다”고 당당하게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