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이 휘날리는 설원에 17세의 소녀가 홀로 섰다. 스노보드를 내달리던 그는 하프파이프 가장자리 상단 립(lip)에 보드가 걸려 넘어졌다. 보통은 기울기가 있는 트랜지션 구간에서 착지하다가 버티는 힘이 부족하거나 자세가 흐트러지며 엉덩이를 부딪치고 밀려 내려온다. 그러나 그는 립에서 보드가 걸리며 상반신부터 바닥으로 내던져지듯 굴러떨어졌다. 밀착 촬영하던 카메라는 순식간에 뒤로 줌아웃했다. 그는 미동도 없었다. 환호로 가득하던 경기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구급대원에 둘러싸였던 그는 3분 뒤 스스로 몸을 일으켜 걸어나왔다.
2차 시기, 기권할 것으로 예상됐던 소녀는 다시 설원에 섰다. 그리고 또 넘어졌다. 1차 시기보다는 덜했지만 이번에도 엉덩방아를 세게 찧었다. 많은 이들이 “부상에도 계속 도전하는 10대 소녀가 기특하다”고 생각했을 뿐 두 번이나 넘어져 최하위로 밀린 이 소녀가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금메달리스트가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일어섰고, 달렸고, 뛰어올랐고, 곡예처럼 회전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이 여고생의 투지에 열광했다. 미국 NBC는 그를 이번 올림픽 ‘깜짝 스타 13인’과 함께 ‘가장 감동적인 순간’ 8인에 포함하며 “두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시기에 압도적인 연기를 펼쳤다”고 평가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올림픽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보여준다. 최가온의 이야기는 서사의 조건을 모두 갖췄다. 17세의 어린 선수, 타고난 재능, 척박한 환경에서의 성장, 반복된 실패, 마지막 역전극, 그리고 승부를 넘어선 클로이 킴과의 우정까지.
올해 올림픽은 유난히 이런 감동의 ‘도전’ 메시지가 강했다. 개막 이틀 뒤, 만 41세의 나이에 부상을 딛고 복귀한 린지 본이 그 상징이다.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이겨내고 출전했지만, 그는 출발 13초 만에 기문에 부딪혀 쓰러졌고 결국 부상으로 대회를 마감했다. 그의 도전은 ‘무모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메달의 존재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요한네스 클레보는 크로스컨트리 스키 6개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차지하며 한계에 도전했다. 단일 동계올림픽 최다 금메달 기록과 개인 통산 11개의 금메달 보유라는 전설로 기록됐다.
올림픽은 매번 리셋되는 무대다. 과거의 영광은 참고자료일 뿐 다음 대회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올림픽은 세계 최고로 추앙받던 ‘세계 1위’의 무덤이 되기도 한다. 피겨 역사상 처음으로 4바퀴 반 점프를 성공시키며 절대 강자로 군림하던 일리야 말리닌의 실패가 그렇다. 프리프로그램에서 연쇄 실수를 범하며 무너진 그의 모습은 이번 대회 최대 이변 중 하나로 꼽혔다. 세계선수권에서는 2위와 30∼40점 이상의 압도적 차이를 벌리던 선수도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점이 도전을 가능하게 한다. 빙판은 미끄러워 누구라도 넘어질 수 있고, 설원의 바람은 마지막 0.01초의 결과를 바꾸기도 한다. 그 누구에게도 ‘예정된 승리’는 없다. 세계랭킹 1위도, 전 대회 챔피언도, 가장 어려운 기술을 가진 선수도 단 한 번의 실수 앞에서는 평등하다.
올림픽 모토인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강하게”는 단순히 타인과의 경쟁을 위한 구호가 아니다. 공정한 규칙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실패를 감내하며, 다시 도전하는 태도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올림픽은 극한의 스릴로 아드레날린의 쾌감을 소비하는 익스트림 쇼와 구별된다.
올림픽은 사실상 삶의 축소판이다. 영원한 1등은 없고 출발선은 매번 다시 그어진다. 그 안에서 성공과 실패, 환호와 침묵, 박수와 눈물이 교차한다. 중요한 것은 기록이 아니라 다시 서는 용기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무대에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