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법 개정안 통과, 70여년 만에 ‘적국’ 틀 깨… ‘경제안보 안전망’ 구축

기존 법에선 北에 누설 때만 처벌
외국 및 준하는 단체로 범위 확대
“AI시대 기술 유출 예방 의의” 평가

26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형법 98조(간첩법) 개정안의 핵심은 적용 범위를 ‘적국’에서 ‘외국 및 이에 준하는 단체’로 확대한 점이다. 1953년 일본의 전시형법을 모방해 만들어진 뒤로 단 한 차례도 개정되지 않았던 이 법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본회의를 통과한 헌정사상 첫 사례다.

개정 간첩법에는 외국 등을 위한 간첩 행위를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는 조항이 신설됐다. 적국을 위한 간첩 행위를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한 조항은 종전과 동일하다.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32회 국회(임시회) 제8차 본회의에서 형법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수정안이 재적296인, 재석 170인, 찬성163인, 반대 3인 기권 4인으로 가결되고 있다. 뉴시스

또 간첩 행위를 ‘적국 또는 외국을 위해 지령, 사주, 그 밖의 의사 연락하에 국가기밀을 탐지·수집·누설·전달·중개하거나 이를 방조한 행위’로 구체화했다. 간첩 행위에 대한 규정이 없던 기존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법 적용 남발을 막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다.



기존 간첩법엔 적국을 위한 간첩을 처벌하는 규정만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적국은 현재 기준 사실상 북한뿐이다. 따라서 지구상 그 어느 나라에 국가기밀을 누설해도 북한만 아니면 간첩법으로 처벌할 수 없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간첩법 적용 범위를 적국으로 한정하는 나라는 한국뿐이었다.

더욱이 북한은 우리 법체계상 국가가 아닌 ‘반국가단체’여서 북한을 위한 간첩에 간첩법을 적용할 경우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이 때문에 북한 간첩에게는 국가보안법이 적용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기존 간첩법으로는 그 어떤 간첩도 처벌할 수 없었다.

 

2024년 7월 군 정보요원들의 신상을 1억6000만원을 받고 중국 측에 넘긴 국군정보사령부 소속 군무원에게는 간첩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중국은 적국이 아니어서다. 외국인들이 “취미 생활”이라며 드론으로 군사기지와 국가정보원 등을 무단 촬영해도 마찬가지였다.

치명적 법망 미비가 70년 넘게 지속되는 가운데 각 기업의 핵심기술을 외국에서 탈취하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우리의 경제안보도 위협받았다. 삼성전자의 폴더블폰, 반도체 등 기술 유출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수십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재계는 기술탈취가 반복될 경우 외국과의 기술격차가 좁아지다 못해 역전될 수 있다는 위기감 속 간첩법이 조속히 개정되길 바랐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본격화하며 법 개정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서울고검장을 지낸 법무법인 광장 김후곤 대표변호사는 “70여년 만에 ‘적국’이란 낡은 틀을 깨고 ‘국익’을 정조준한 이번 개정은 군사기밀을 넘어 반도체, 방산 등 현대 국가경쟁력의 핵심인 산업·경제 안보까지 간첩죄 영역에 포섭함으로써 안보와 경제가 하나 된 시대에 걸맞은 강력한 국가적 방어막을 구축했다”고 환영했다.

한국산업보안한림원 강기중 회장은 “외국 정부 주도의 우리 기업 핵심기술 탈취를 막아주는 예방적 입법이 실현됐다”고 말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안기현 사무국장(전무)은 “반도체 기술 유출로 산업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질 수 있다”며 “경제안보, 나아가 국가를 살리는 간첩법 개정을 환영한다”고 했다. 유창준 전 국정원 방첩국장은 “우리의 핵심기술들이 그간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고 생각했던 외국 세력들도 앞으로는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이번 법 개정을 통해 기밀유출 사범에 대한 대응 시스템을 재정비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만들어지길 기대한다”고 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AI 시대에 첨단기술 유출을 막고 경제안보를 수호하기 위한 법적 안전망을 확보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며 “이재명정부는 이번 개정안 통과를 계기로 더욱 안전한 나라, 경쟁력 있는 진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힘쓰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