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09년 2월,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의 한 여관에 엄숙한 표정의 한국인 열두 명이 하나둘 들어섰다.
이윽고 왼손 약지 한 마디를 잘라낸 이들은 흘러내리는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 네 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쳤다. 이들의 '단지(斷指) 동맹'을 이끈 안중근은 8개월여 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체포된다.
안중근은 손가락을 자른 이유를 묻는 일본 경찰의 질문에 "(대한국이) 독립할 때까지는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감행할 생각"이라며 "국가를 위해 진력하는 열심을 타인에게 보여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단지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안정근이 해방 이후에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1949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두면서 손가락의 자취는 사라졌다. 안정근의 유해는 상하이 만국공묘에 묻혔으나, 이후 중국 내전과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묘소가 유실되면서 안중근의 손가락도 끝내 오리무중이 됐다.
해마다 3·1절과 광복절이면 안중근의 유해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지만, 학계는 현실적으로 발굴이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손가락 역시 시간이 흐르며 자료가 멸실돼 찾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일각에서는 행방조차 알 수 없게 된 이 손가락이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이산과 유랑을 거듭해야 했던 안중근 일가의 불행한 운명을 대변한다고 분석한다.
학계는 일제강점기 안중근 일가에서 40여 명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도 그만큼 집요했다.
장남 분도(본명 문생)는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일제 밀정에게 독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차남 준생은 일제의 집요한 회유에 넘어가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에게 사죄하는 친일 행각을 벌였고, 광복 후 지탄 속에 은둔하다 쓸쓸히 숨을 거뒀다.
독립운동 세력 내부의 갈등도 위협이었다. 한인애국단 단장으로서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기획했던 막냇동생 공근은 1939년 임시정부 내부 갈등에 휩쓸렸고 이후 실종됐다.
해방 이후 터진 좌우 이념 갈등은 일가의 운명을 더욱 잔인하게 갈라놓았다. 현재 안중근의 후손들은 남북한은 물론 중국, 미국, 남미 등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조용히 살아가는 것으로 전해진다.
2000년 이후 국가 주도로 안중근 유해 발굴이 두 차례 시도됐지만, 정작 동생 안정근을 비롯해 해외에서 눈을 감은 가족들의 유해는 제대로 된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독립운동사 연구 권위자인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안중근 의사의 집안이 풍비박산을 겪고 각국으로 흩어진 '디아스포라'에 대해서는 아직 조명되지 않았다"며 "흩어진 후손들을 찾아 한데로 모으는 일이 유해 발굴 작업보다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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