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메네이는 누구 호메이니 이어 최고지도자 등극 이슬람 율법 따라 억압 정책 펼쳐 권력 대리에 라리자니 지정설도 국회의장·대법원장도 후계 거론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격 공습으로 사망한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는 37년간 신정체제의 정점에서 이란을 이끌어 왔다. 반(反)서방 행보와 이슬람 근본주의에 기초한 대내 강경책은 서방 진영과의 끊임없는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 이번 공습으로 그의 ‘철권통치’는 막을 내리게 됐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은 하메네이에 대해 “신중하고 실용적이며 보수적이면서도 무자비한 혁명가”라고 평했다.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가 대통령 재임 시절인 1981년 군복을 입고 행사에 참가한 모습.AP연합뉴스
1939년 이란 북동부 마슈하드에서 태어난 하메네이는 시아파 이슬람성직자 가문의 후손이다. 1958년 시아파 성지인 이란 서부 도시 곰으로 이주해 초대 최고지도자인 루홀라 호메이니에게서 신학을 배우며 그와 가까워졌고, 함께 정치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메네이는 호메이니와 1978년 이란 이슬람혁명을 일으켰고, 이듬해 팔레비 왕조를 축출하고 이슬람공화국을 세웠다. 하메네이는 국방차관에 오르며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981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97% 득표율로 3대 대통령이 됐다. 이슬람의 첫 성직자 출신 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해 1989년까지 재임하며 이란·이라크 전쟁을 이끌었다. 알자지라는 “서방 국가들이 이라크를 지원하면서 느꼈던 고립감이 하메네이가 서방, 특히 미국에 대한 불신을 더욱 깊게 만든 계기”라고 설명했다.
호메이니가 1989년 숨지자 뒤를 이어 2대 최고지도자에 올랐다. 1990년대 하메네이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충성파를 육성하며 권력을 공고히 다져갔다. 그가 최고지도자에 오르기 전부터 관계를 쌓았던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는 핵심 권력 기반이었다. 이란이 창설을 도왔던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와 밀착하면서 중동 반미 세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임기 내내 반서방, 반미를 표방했으나 체제 유지를 위한 실용적인 대외 노선도 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7년 이란 대선에서 개혁파 진영의 모하마드 하타미가 승리하자 그에게 어느 정도 재량을 부여했고, 2001년 9·11 사태 국면에서 하타미 당시 대통령의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막지 않은 것이 대표적이다. 2015년에는 서방과의 이란 핵 합의(JCPOA)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면서도 이행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기도 했다.
대내적으로는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여성, 동성애자, 종교적 소수자를 탄압하며 억압적인 정책을 폈다. 1999년 개혁파 신문 살람이 폐간된 데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 2009년 강경파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에 반발하는 시위, 2022년 이른바 ‘히잡 시위’ 등을 강경하게 진압했다.
집권 후반기에는 오랜 서방의 제재로 경제 상황이 악화하면서 내부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 영향으로 지난해 말 테헤란 상인들의 항의로 시작된 시위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번졌고, 하메네이는 IRGC를 동원하면서 무차별 유혈진압을 감행했다.
후계자로는 알리 라리자니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 사무총장,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국회의장, 골람호세인 모세니-에제이 대법원장, 호메이니의 손자이며 개혁파 소속 온건 성직자인 하산 호메이니 등이 거론된다.
라리자니는 국회의장 및 4개 부처 장관직을 지냈고, 이란혁명수비대에서 지휘관으로 복무한 경력도 있어 이란 통치체제에 영향력이 크다는 평가다. 갈리바프는 이슬람혁명수비대 내 기반이 두터워 강경파의 지지가 높다는 분석이다. 하메네이는 생전 자신의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유고 시 권력을 대리할 인물로 라리자니를 지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분간 이란 내 혼란이 지속하면서 후계 구도가 윤곽을 드러내는 데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이란 헌법상 최고지도자직은 자동 승계되지 않고, 88명의 성직자로 구성된 ‘전문가 회의’가 차기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공습으로 핵심 지도부가 제거된 상황에서 제대로 승계절차가 이뤄질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