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적 힘과 질서, 삶을 향한 지독하고도 조용한 애착 [신리사의 사랑으로 물든 미술]

무심한 세계를 견디는 방법 - 에텔 아드난과 이성자의 우주적 상상력

삶에 대한 우주적 시야 가지는 것은
세밀한 부분까지도 회복해내는 과정

‘희망’이라는 섣부른 위로가 아니라
가혹한 세계 직시하는 ‘생의 감각’

관계 속에서 제자리 찾아가는 과정
파괴와 상실 건너가게 하는 힘 믿어

“거대한 기계 속에 놓인 위대한 아이.”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1934∼1968)이 훈련 비행 중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레바논 출신의 예술가 에텔 아드난(1925∼2021)은 그를 이렇게 부르며 애도의 시를 썼다. 인류사의 ‘영웅’이 ‘아이’라고 불린 순간, 그의 서사는 거대한 시대의 장치에 실려 간 취약한 인간의 사건이 된다. 기계는 빛을 약속하지만, 그 빛은 눈부시고 위험하다.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 진행되는 에텔 아드난 & 이성자 2인전 ‘태양을 만나다’는 아드난이 남긴 애도의 문장에서 출발한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태양을 만나는 일’과 ‘죽음을 만나는 일’을 같은 호흡으로 놓는다. 태양이 환희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파괴적인 빛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시작과 끝을 한 문장 안에 묶어두었다.

에텔 아드난 & 이성자 2인전 ‘태양을 만나다’ 전시 전경. ⓒADAGP, Paris and DACS, London 2025, ⓒthe artist. Photo ⓒWhite Cube(Jeon Byung Cheol).

◆무너진 땅의 질서 속에서

아드난의 삶 또한 격렬한 빛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프랑스와 캘리포니아에서 거주한 그는 1970년대 초 베이루트로 돌아왔으나 레바논 내전 발발로 고향을 다시 떠나야 했다. 진보와 승리를 명분으로 자행된 전쟁은 거대한 섬광을 내뿜으며 땅의 질서를 태워버렸다.

전시는 같은 시대, 전쟁의 상흔과 가정사의 아픔을 뒤로한 채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자신만의 추상 언어를 구축한 이성자(1918∼2009)의 작업을 곁에 둔다. 이방인으로 살았던 두 사람에게 대상을 응시하는 일은 고독한 삶을 지탱하는 축이 되었다. 이성자가 대지를 넘어 우주의 섭리로 나아갔다면, 아드난은 지상의 풍경 너머로 쏟아지는 태양의 박동을 붙잡았다.

전쟁과 망명은 땅의 질서를 찢어놓는다. 관계가 상실되고, 오늘이 어제와 이어지지 않는다. 단절의 순간, 남는 것은 결국 하늘과 태양 같은 기본값뿐이다. 태양은 그중에서 가장 무심하게 뜨고 지며 세계의 질서를 알린다. 혼란의 시대에 태양을 바라보는 일은 무너지지 않는 우주에 몸을 맡기는 일이자, 태우는 힘까지 포함한 질서를 견디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전시장 초입에 자리한 이성자의 ‘White Mirror’는 태양의 양가성을 다소 단순한 형태로 꺼내 보인다. 황금빛 배경 위, 희고 둥근 형상이 붉게 비어 있는 삼각형과 마주한다. ‘하양’은 비워진 색인 동시에 모든 빛이 응축된 상태이며, 원과 삼각형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에너지가 순환하며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변적 존재다. 흰 원이 붉은 공허를 비추는 구도는, 빛이 어둠이 되고 충만히 비어 있는 우주의 속성을 암시한다. 곁에는 산의 풍경을 닮은 아드난의 ‘Untitled’가 전시되어 그 질서를 우주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불러온다. 선명한 색면은 무엇을 ‘설명’하기보다, 태양이 가하는 힘과 질서, 그럼에도 존재하는 것들의 풍경으로 담담히 남아 있다.

에텔 아드난, ‘Farandole’, 1960s(2022), 태피스트리, 128.5×187.5㎝. ⓒADAGP, Paris and DACS, London 2025. Photo ⓒWhite Cube (Thomas Lannes).

◆영원한 춤

이성자는 단오와 도시의 풍경을 그린 그림에서 세계의 질서를 움직임으로 발현한다. 초여름의 햇살과 명절의 분주한 움직임,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며 퍼져 나간다. 화면을 지배하는 빨강과 파랑은 대립하지 않고 조화롭게 녹아든다. 여기서 조화는 싸움을 멈추게 하는 일이라기보다, 같은 에너지가 서로를 태우지 않도록 배치되어 ‘춤’이 되게 하는 일이다. 촘촘히 자리 잡은 집들은 은하수를 이루는 별이 되고, 도시는 우주의 축제가 된다.

떠들썩하고 활기찬 에너지는 아드난의 태피스트리에서도 동일하게 감지된다. ‘Farandole’은 프로방스 전통 춤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는다. 실을 촘촘히 짜 맞추는 태피스트리의 리듬은 손을 잡고 여럿이 함께 추는 춤의 형태를 닮아 있다. 원색의 자연으로 환원된 풍경 속에서 춤은 파괴 이후에도 세계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생의 리듬으로 은유된다. ‘황량한 해변’이라는 뜻의 ‘Plage Deserte’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적없는 해변은 찬란한 원색의 선들이 진동하며 선율을 이룬다. 아드난은 이처럼 파괴가 끝내 파괴할 수 없는 것들, 즉 고독 속에서도 박동하기를 멈추지 않는 삶의 의지를 반복해서 가리킨다.

◆덧칠하는 마음과 건너가는 시간

두 작가에게 우주적 시야를 갖는다는 것은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세밀한 부분들을 회복해내는 과정이다. 거대한 세계의 이치를 발견한 시선은 발밑의 미소(微小)한 존재들로 향한다. 이성자의 ‘The Vivid Dews’에는 투명한 이슬을 보기 위해 수없이 덧그리는 마음이 담겨 있다. 연약하고 미세하지만 세계를 담고 있는 찰나의 반짝임을 놓치지 않으려는 붓질.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져버릴 것들을 적절한 거리와 ‘주의’, ‘반복’을 통해 붙잡는다.

이성자, ‘The Vivid Dews’, 1960, 캔버스에 유채, 100×81㎝. ⓒthe artist.

전시의 흐름은 두 작가가 궁극적으로 향하고자 했던 ‘시간’으로 이어진다. ‘장애물 없는 시간’이라는 뜻을 지닌 이성자의 ‘Le Temps Sans Obstacle’에서는 밝은 태양을 닮은 형상이 환한 언덕 위 집들을 바라보거나 황금빛 배를 타고 어딘가로 건너가는 모습이다. 여기서 제시된 것은 장애물 없는 ‘공간’이 아닌 ‘시간’이다. 그것은 모든 제약이 사라진 상태이자, 정지했던 삶이 다시 앞으로 흐르기 시작한 상태를 의미한다. 작품은 ‘상실 이후’의 세계를 직접 설명하는 대신, 막히지 않고 흐르는 시간의 감각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그 ‘시간’은 아드난의 눈부신 색면의 향연으로 연결된다. 병치된 색면들은 여러 경계 사이에서 리듬을 얻으며, 모든 것이 관계 속에서 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속에는 회피가 아닌, 모든 파괴와 상실을 건너가게 하는 힘이 있을 것이라는 작가의 믿음이 자리한다.

◆세계를 다시 세우는 법

아드난과 이성자가 작업을 통해 건네는 것은 “희망”이라는 섣부른 위로가 아니라, 가혹한 세계를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게 만드는 생의 감각이다. 비난이나 좌절을 택하기보다, 자신을 더 큰 질서 안에 잠시 놓는 방식으로 현실을 살아내는 것이다. 기꺼이 에너지를 맞대어 춤을 만들고 증발할 이슬을 정성껏 덧칠하는 행위는 삶을 향한 지독하고도 조용한 애착에서 비롯된다.

거대한 기계는 계속 돌아가고, 우리는 여전히 그 안에서 미약하게 존재한다. 눈부심과 무심함, 태우는 빛까지 견디며 세계를 다시 세우는 힘. 그것이야말로 혼란의 시대에 우리가 예술로부터 받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지지이자 응답일 것이다.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