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임 없이 떠나…"정치의 사법화, 양극화사회서 사법불신으로 이어질 가능성" '법의 지배'·'법관 용기' 강조…"사법권 독립·국민 신뢰가 사법부 디딤돌"
노태악(64·사법연수원 16기) 대법관이 6년의 임기를 마무리하고 3일 퇴임했다. 전례 없는 여당발 '사법개혁' 파고 속에 물러나는 그는 "설마 하는 우려가 현실이 되는 상황을 마주하며 마음이 무겁다"며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다시 회복할 때까지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이례적으로 후임 대법관 후보자가 지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 대법관이 퇴임해 대법원 재판부(소부) 구성도 조정이 이뤄질 전망이다.
노 대법관은 이날 서초동 대법원 청사 중앙홀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이같은 마지막 소회를 밝혔다. 그는 "법관은 끊임없이 시대의 변화를 바로 보면서 시대와 호흡을 같이 해야 한다"며 "그렇지만 변화하는 시대에도 포기할 수 없고 지켜내야 하는 핵심적인 가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노태악 대법관이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퇴임사하고 있다.
이어 "'법원의 판결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법률의 해석에는 사법의 본질이라는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점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며 "우리가 '법의 지배'라는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고 부연했다.
'법의 지배'는 권력자의 자의적 지배인 '법에 의한 지배'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흔히 법치주의와 동의어로 받아들여진다. 과거 왕정 시대 영국에서 '누구든지 법원이 적용하는 법 이외에는 지배받지 않는다'는 개념으로, 왕권에 대한 법의 우위를 강조한 데서 출발했다.
그간 사법부는 '법의 지배'라는 원칙하에 주어진 법률에 따라 판결을 통해 이를 해석하는 역할을 강조해왔다.
노 대법관은 또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그렇게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안을, 사법부로 가져오는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라며 과도한 '정치의 사법화'로 사법불신이 초래된 측면이 있다는 점도 거론했다.
그는 "누군가 '정치의 사법화는 지금처럼 양극화된 사회에서 결국은 사법불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고 말했다"며 "사법의 결론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어느 한쪽의 비난과 공격을 피해 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 대법관은 "그 가운데서도 법관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내야 한다"며 "법관에게 용기라는 덕목이 점점 더 크게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노 대법관은 "사법부의 디딤돌은 사법권의 독립과 국민의 신뢰 두가지라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사법권의 독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법관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나 혜택은 더욱 아니다. 오직 재판이 공정하게 이뤄지는 것을 보장함으로써 법치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해 궁극에는 국민의 법적 평화와 행복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법권의 독립은 그 자체를 추구한다고 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함께 공정한 재판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얻을 때 제대로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설마 하는 우려가 현실이 되는 상황을 마주하며 마음이 무겁지만,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고 존경을 받을 때까지 노력해달라"며 "저도 법원 바깥에서 한없는 응원을 보내겠다"고 덧붙였다.
노 대법관은 사법연수원 교수,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쳐 고법 부장판사로 올라간 뒤 서울고법 부장판사, 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 서울북부지방법원장 등을 지냈고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 3월 당시 조희대 대법관 후임으로 임명됐다. 2022년 5월부터 중앙선거관리위원장도 겸임했다.
한편 조희대 대법원장의 대통령에 대한 후임 후보자 임명 제청이 40일 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대법관은 당분간 13명(대법원장 포함)으로 운영된다. 여권의 강도높은 사법개혁 속에 청와대와 사법부 간 물밑 조율이 제대로 안 돼 제청이 지연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