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바랜 피파 평화상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지난 2월19일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이른바 ‘평화위원회’(Board of Peace) 첫 회의가 열렸다. 평화위원회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해 만든 신생 국제기구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의 휴전 이후 중동 가자 지구의 평화 구축과 재건 지원을 목표로 한다. 세계 각국 정상 또는 고위급 외교관 50여명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 하나가 눈에 띄었다. 국제축구연맹(FIFA·피파) 지아니 인판티노 회장이 주인공이다. 회의 주재자인 트럼프가 직접 그를 소개한 뒤에야 의문이 풀렸다. 트럼프는 “피파가 가자 지구의 평화 프로젝트에 들어갈 750억달러(약 109조원)의 모금을 도울 것이란 점을 발표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축구는 세계를 하나로’라는 모토 아래 제정된 피파 평화상 트로피. 지난 2025년 초대 수상자가 되는 영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SNS 캡처

세계 최대의 스포츠 시장인 미국에서 축구를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만드는 것은 피파의 오랜 염원이다. 미국인들은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아메리칸풋볼(미식축구)을 무척 즐긴다. 반면 운동 종목으로서 축구에 대한 인지도나 선호도는 유럽 및 중남미보다 훨씬 떨어진다. 오죽하면 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풋볼’(football)로 알고 있는 축구가 미국에서는 미식축구에 밀려 ‘사커’(soccer)란 낯선 용어로 불리겠는가. 오는 6월 개막할 북중미 월드컵을 앞두고 북미 대륙에 축구 붐을 일으키고자 하는 피파로선 조바심을 느낄 법도 하다. ‘흥행 대박’ 월드컵을 위해선 미국 행정부, 누구보다 트럼프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인판티노 피파 회장은 2025년 ‘피파 평화상(Peace Prize)’이란 것을 제정했다. “전 세계 사람들을 평화롭게 하나로 묶는 데 기여한 이에게 매년 수여할 것”이라고 거창한 취지를 밝혔다. 북중미 월드컵 조 추첨식과 동시에 제1회 피파 평화상 시상식이 열렸다. 초대 수상자가 되는 영예는 트럼프에게 돌아갔다. 그에 앞서 2025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 발표가 임박하자 트럼프는 “내가 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판티노 회장도 동의 의사를 밝히고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하지만 트럼프의 수상은 불발에 그쳤다. 이에 인판티노 회장이 낙담한 트럼프를 위로하려고 그에게 피파 평화상을 안겨 줬다는 추론이 파다했다. 국제사회에서 인판티노 회장과 피파의 ‘아첨 외교’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2025년 12월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열린 제1회 ‘피파 평화상’ 시상식에서 수상자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지아니 인판티노 피파 회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상 메달을 목에 걸고 있다. AP연합뉴스

2025년 3월 아시아 지역 예선을 가뿐히 통과한 이란은 본선행 티켓을 쥐고 당당히 북중미 월드컵 무대를 밟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미군의 공습으로 전쟁이 시작되며 미국에서 열리는 월드컵 조별 리그 참여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란축구협회가 월드컵 출전 포기 의사를 밝히자 트럼프가 내놓은 반응이 가관이다. 그는 3일 언론 인터뷰에서 “이란이 월드컵에 참가하든 말든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며 “이란은 패배한 국가”라고 조롱했다. 이것이 피파 평화상 초대 수상자의 발언이라니 기가 막힌다. ‘축구는 세계를 하나로’라는 피파 평화상의 모토는 시작과 동시에 빛이 바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