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난 세상] ‘각본 없는 드라마’ 패럴림픽

사람들은 스포츠를 ‘기록의 언어’로 해석하곤 한다. 기록을 몇 초 단축했는지, 몇 점을 더 얻었는지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경기장 전광판에 남는 건 오직 숫자뿐이다. 1밀리초 단위로 잘게 쪼개진 시간, 점수로 환산된 경기력 그리고 순위로 정렬된 결과. 숫자는 의심의 여지없이 객관적인 기준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기록의 언어’는 냉정하다.

하지만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정돈된 기록의 뒤편에는 숫자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 숫자는 결과를 설명할 수 있을지언정,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켜켜이 쌓인 시간과 인내의 무게를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권준영 문화체육부 기자

패럴림픽은 그 지점을 가장 선명하게 비추는 무대다. 숫자로는 해석되지 않는 선수들의 땀과 헌신 그리고 의지의 무게를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전광판에는 단지 0.001초의 차이만이 새겨지지만, 그 찰나의 간극 속에는 선수들의 굵은 땀방울과 말없이 삼켜낸 눈물이 응축돼 있다. 그렇기에 패럴림픽의 기록은 단순한 숫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한계를 넘어선 인간이 세상에 새겨 넣은 압축된 서사다.



패럴림픽을 ‘각본 없는 드라마’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무대에는 미리 쓰인 대본도, 대신 연기해 줄 배우도 없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삶의 궤적이 경기로 드러날 뿐이다. 수없이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선 시간, 포기 대신 도전을 택한 날들이 경기 안에서 뜨겁게 폭발한다. 패럴림픽은 기록을 넘어 인간의 의지와 존엄을 증명하는 무대이며, 그 순간은 깊은 울림이 돼 우리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남는다.

이번 패럴림픽은 여러모로 각별하다. 1976년 스웨덴에서 첫 동계패럴림픽이 막을 올린 지 꼭 50년, 반세기의 시간을 건너 다시 쓰이는 역사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아울러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두 번째 동계패럴림픽이라는 상징성도 품고 있다. 과거의 발자취 위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는 무대라 볼 수 있다. 이번 대회는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를 넘어 시대를 잇는 역사적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지난달 2일 서울 송파구 서울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패럴림픽’ 결단식 취재 현장이 문득 떠오른다. 한국 장애인 스포츠의 간판스타이자 노르딕스키 종목 메달 유력 후보인 김윤지(BDH파라스)는 취재진 앞에서 담담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올림픽이든, 패럴림픽이든 많은 선수가 땀 흘리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경기를 지켜보시면 분명 힘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짧은 한 문장이었지만, 수없이 반복해온 훈련의 시간과 스스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피와 땀으로 체화된, 흔들림 없는 자기확신이었다.

전광판에 새겨진 숫자는 언젠가 사라진다. 메달색과 기록의 차이도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질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은 숭고한 도전정신은 오래도록 기억된다. 패럴림픽은 단순한 경쟁의 장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어떻게 넘어서는지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자리다. 그들의 질주는 스스로 설정해온 경계를 뛰어넘는 용기이자, 절망의 끝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의지의 선언이다. 그 순간이 숫자를 넘어, 인간 존엄의 깊이를 새기는 한 편의 서사로 기록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