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으로 호르무즈해협이 봉쇄되면서 국제 해운 운임과 해상 보험료가 동시에 치솟고 있다. 중동 항로에 이른바 ‘전쟁 프리미엄’이 붙으며 글로벌 해운시장 전반에 운임 상승 압력이 확산하는 모습이다. 우리 수출기업들은 물류비 상승에 더해 납기 지연 가능성 등에 따른 부담과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내 최대 에틸린 생산시설을 운영하는 여천NCC가 고객사들에게 ‘공급 불가항력’을 선언하는 등 원유 공급 차질에 따른 파장도 가시화하고 있다. 국내로 들어와야 할 유조선이 호르무즈해협에서 발 묶인 정유업계는 비상 대응 중이고, 정부는 에너지 수급 안정을 위해 아랍에미리트(UAE)로부터 원유 600만배럴을 긴급 도입키로 했다.
8일 해운업계에 따르면 중동 항로 리스크가 확대되면서 유조선 운임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유조선의 스폿(단발성) 운임을 나타내는 유조선지수(World Scale·WS)는 3일(현지시간) 기준 465.56포인트를 기록했다. 전쟁 발발 전인 지난달 27일 224.72포인트와 비교하면 불과 며칠 사이 두 배 이상 뛰었다.
중동∼극동 노선을 오가는 초대형유조선(VLCC·20만∼30만t 규모 원유운반선)의 하루 용선료도 같은 기간 21만8154달러에서 42만3736달러로 치솟으며 두 배 이상 상승했다.
국내 정유업계는 비상 대응 체제에 들어갔다. SK에너지와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는 중동 정세 악화 이후 원유 수급 상황을 수시로 점검하면서 중동 전쟁 장기화에 대비한 공급선 다양화 등 여러 대책을 고심하고 있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트레이딩 부서를 비롯한 유관부서에서 대체 원유 확보와 선박 용선 등을 24시간 점검하고 있으며 재고와 가동률 관리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며 “매일 상황이 바뀌는 만큼 업계 전반이 긴급하게 대응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투자해 연간 약 229만t의 에틸렌 생산 능력을 보유한 여천NCC는 이날 고객사에 제품 공급이 어려울 수 있다는 ‘공급 불가항력’을 선언했다. 불가항력은 전쟁 등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으로 제품 계약 이행이 어려울 때 책임을 면제받기 위한 조치다. 석유화학 업체들은 고객사에 필요한 물량을 제때 공급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즉시 이를 통보해야 한다. 국내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은 평균 1~2개월 분량의 나프타 원료를 비축하고 있는데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장기화될 경우 이달부터 주요 NCC(나프타 분해시설)들의 불가항력 선언이 연쇄적으로 나타날 전망이다.
원유 수급 차질에 대한 시장 불안이 확산하자 정부는 호르무즈해협 통과가 필요하지 않은 UAE 지역 대체 항만에 각 200만배럴 규모의 우리 국적 유조석 2척을 즉시 접안토록 하는 등 UAE에서 원유 600만배럴을 긴급 도입하기로 했다. 다만 국내 하루 석유 소비량 기준으로 약 3일치 수준이라 유가 안정에는 역부족이란 평가도 나온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국내외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할 수밖에 없다.
한국해양진흥공사는 최근 발표한 ‘호르무즈해협 통항 제한 상황에 따른 해운·물류 영향 분석’ 보고서를 통해 “과거 중동 분쟁과 달리 이번 지정학적 위험은 호르무즈해협 통제권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이라며 “단기적인 원유·LNG 수급 불안 심화와 함께 글로벌 해운 물류망의 연쇄적 마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