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사태 장기화 조짐에 정부 추경 카드 꺼내나…“정책 수단 최대한 활용한 뒤 검토해야”

중동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정부 재정 역할론이 부상하고 있다. 유가가 배럴당 110달러를 돌파한 가운데 향후 물가 급등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이 커질 것으로 예측되는 만큼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을 선제적으로 편성해 충격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22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발발할 당시에도 정부는 유가보조금 확대 등 에너지·물가 부담 완화를 위한 대책을 추경에 담은 바 있다. 다만, 대규모 추경은 재정 건전성 악화 등 각종 부작용도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유류세 인하 등 정책 수단을 최대한 활용한 뒤 경기 상황에 맞춰 필요 최소한으로 편성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9일 경제계에 따르면 지난달 28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시작된 이번 사태는 물가를 자극해 금리 인상 압력을 높이는 한편 수출·증시 불안을 확대해 고환율을 부르는 등 ‘3고’(고물가·고환율·고금리)를 가중시킬 수 있다. 당장 이날 서울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ℓ당 각각 1920.1원, 1947.4원으로 오름세를 지속하는 등 고유가발 물가 불안이 엄습하고 있다. 매점매석 단속 등과 같은 행정 절차만으로 고유가 파장을 잠재우기 쉽지 않은 상황인 셈이다.

 

이에 따라 정부 재정을 적재적소에 투입해 경기 충격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가재정법에 따르면 추경은 경기침체 등 대내외 여건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 편성할 수 있다. 원유 수입 물량의 70% 정도를 중동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 구조를 감안하면 향후 경기 침체가 현실화할 경우 추경 요건은 충족된다는 평가가 나온다. 올해의 경우 예년과 달리 세수 여건도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다. 적자국채 발행 없이 초과세수 등을 활용할 여지가 있는 셈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올해 국세수입을 396조1000억원으로 전망해 정부 예산보다 5조9000억원 더 걷힐 것으로 내다봤다. 우석진 명지대 교수(경제학)는 “국가예산법상 추경요건은 재해, 경제위기, 새로운 법령이 만들어지는 경우인데 지금 경제위기와 지방정부 통합 등으로 요건에 해당되는 상황”이라면서 “세수가 나쁘지 않아서 추가적인 국채 발행 없이 재정을 확보할 수 있고, 기금 등 여러 운영수익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채운 서강대 명예교수(경영학)는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추경은 필요하다고 본다”면서 “경제는 실물도 있지만 심리도 중요하다. 추경을 하지 않으면 피해가 발생하는 데 정부가 소홀하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러·우 전쟁이 파장이 컸던 2022년 5월에도 추경이 편성된 바 있다. 당시 코로나19로 큰 피해를 봤던 소상공인 손실보전금 지원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긴 했지만, 에너지·물가 부담을 줄이기 위한 대책도 다수 담겼다. 저소득층을 위한 에너지 바우처 지원 단가를 인상하고 대상을 확대하는 한편 어업인 면세유 유가연동보조금 한시 지원하기도 했다. 고유가에 따른 공급 측면의 물가 상승이 예상되는 만큼 정부 재정이 수요를 자극해 물가 압력을 높이는 경로에 대한 불안감도 상대적으로 덜한 상황이다.

 

서울 시내 한 주유소의 모습. 연합뉴스

다만, ‘추경 만능론’은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중동 사태가 제한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상황인 데다 올해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이 국내총생산(GDP)의 3.9%에 달할 것으로 보이는 등 재정 여건도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정책 수단을 총동원한 뒤 경기 침체 가능성이 수그러들지 않을 경우 추경을 고려해도 된다는 것이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경제학)는 “섣불리 추경을 논의하다 사태가 진정되면 재정 건전성만 악화할 수 있다”면서 “지금은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경제학)는 “아직 현 상태에서 경기 위축된다고 보긴 어렵고, 물가 오르는 것은 비축유가 있으니 추이를 파악해야 한다”면서 “지금은 돈을 많이 쓴 상태로 추경은 무리”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추경을 검토하더라도 환율을 자극하지 않는 규모로 편성하되 중동 사태로 피해를 본 계층을 집중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우 교수는 “유가환급금, 유류세 등 조정할 부분은 하고, 조금 더 어려워진다면 추경을 통해 바우처 지급, 운송업 지원에 나서는 등 단계적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면서 “10조원 내외 추경은 환율 영향도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세은 충남대 교수(경제학)는 “사태 장기화로 추경을 편성한다면 자영업자부터 에너지 대책까지 포함돼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