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12월7일 일본이 미국령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한 직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중립국이던 미국과 달리 벌써 2년 넘게 나치 독일과 2차대전을 치르고 있던 영국 시민들은 지도를 펼쳐 보고선 깜짝 놀랐다. 일본과 하와이 사이의 먼 거리를 감안하면 일본군 전투기가 진주만을 마음껏 유린할 수 있다는 점이 선뜻 이해가 안 갔다. 무기 등 군사 분야에 나름의 식견이 있는 사람들만 ‘아하’ 하며 손으로 무릎을 탁 쳤다. 영국 해군도 활용하고 있는 항공모함의 존재를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항모 보유국이 영국, 일본, 미국 등 극소수에 불과하던 시절 얘기다.
2차대전 종전 후 80년 넘게 지난 오늘날에도 항모를 가진 나라는 10개국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문재인정부 시절인 2021년 경(輕)항공모함 도입 추진을 본격화했다. 경항모는 이름 그대로 가벼운 항모다. 미국 해군이 보유한 대형 항모들의 절반 내지 3분의 2가량 규모다. 이웃 나라 일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시절부터 헬기 탑재가 가능한 해상자위대 호위함 ‘이즈모’(出雲)와 ‘가가’(加賀)를 개조해 헬기 외에 전투기들도 뜨고 내릴 수 있는 경항모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윤석열정부 들어 주춤했던 경항모 사업이 이재명정부에서 재개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이재명 대통령은 경항모보다는 핵추진 잠수함(핵잠) 건조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프랑스 해군은 딱 한 척의 항모를 운영하고 있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 이름을 딴 ‘샤를 드골’이다. 다만 이는 원자력을 동력으로 삼는 핵추진 항모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전 세계의 항모 보유국들 가운데 핵항모를 만들 능력을 갖춘 나라는 프랑스와 미국 단 둘뿐이다. 취역 후 어느덧 30년 가까이 지난 드골함(艦)이 낡은 가운데 프랑스는 새 핵항모를 건조할 계획이다. 오는 2038년 실천 배치를 목표로 하는 프랑스의 새 핵항모는 배수량 7만8000t, 길이 310m로 드골함(4만2000t, 261m)보다 훨씬 크다. 2025년 12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새 핵항모 건조 계획을 공개하며 “지금과 같은 약육강식 시대에 적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려면 우리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고 이유를 밝혔다.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침공으로 중동 정세가 불안해진 직후 프랑스 정부는 드골함을 중동에서 가까운 동(東)지중해 섬나라 키프로스 인근으로 급파했다. 이란 공격에 직접 가담하는 대신 프랑스와 가까운 중동 산유국들을 이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명분을 들었다. 마크롱은 9일 직접 키프로스로 이동해 동지중해 및 중동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힘쓰는 강대국 지도자로서 존재감을 십분 과시했다. 이 같은 이벤트에 프랑스의 자랑거리인 핵항모도 어김없이 동원됐다. 마크롱이 니코스 아나스타시아데스 키프로스 대통령,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와 나란히 드골함을 방문해 선상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연 것이다. 프랑스 대통령에게 핵항모는 중요한 안보 자산인 동시에 정치 자산임을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