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열린 미국·독일 정상회담의 후폭풍이 쉬 가라앉지 않는 모양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앞에서 저자세로 일관한 것을 두고 ‘과연 유럽연합(EU) 지도국 자격이 있느냐’ 하는 의문이 불거진 탓이다. 당장 유럽 국가들 중에서 트럼프 행정부와 가장 날카롭게 대립하는 스페인부터 “독일이 EU에 굴욕을 안겼다”며 단단히 토라진 모양새다.
11일(현지시간)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따르면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세계 정상들 가운데 유독 메르츠하고만 개인적 연락을 끊었다. 메르츠가 최근 여러 차례 산체스에게 전화를 걸고 문자 메시지도 보냈으나 일절 응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슈피겔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 등이 얼마 전 산체스와 통화한 사실을 거론했다.
이는 지난 3일 백악관에서 열린 메르츠와 트럼프의 정상회담 때문이라는 것이 슈피겔의 해석이다. 당시 트럼프는 비공개 회담 개시에 앞서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한 모두 발언을 통해 스페인을 잘근잘근 씹었다.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직전 스페인에 “미군이 스페인 내 해군 및 공군 기지를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산체스가 차갑게 거절한 것이 이유였다.
트럼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인 스페인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의 금액을 국방비로 써야 한다’는 나토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 점을 질타했다. “스페인은 형편없다”고 단언한 트럼프는 “스페인에는 훌륭한 국민 외에 우리가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다. 국민은 우수하지만, 리더십은 그렇지 않다”고 모욕적 발언을 이어갔다. 급기야 “스페인과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며 “우리(미국)는 스페인과의 모든 무역을 중단할 것”이라고 극언까지 퍼부었다.
이렇게 트럼프가 ‘말폭탄’을 쏟아내는 동안 곁에 있던 메르츠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그냥 듣기만 했다. 훗날 메르츠는 “(방송사)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을 때에는 미국 대통령과 언쟁해선 안 된다”고 해명했으나 대미 저자세, 굴욕 외교라는 지적을 피하지 못했다.
당장 스페인 정부에선 “올라프 숄츠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호세 마누엘 알바레스 외교부 장관), “유럽에 필요한 건 트럼프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부하가 아니다”(욜란다 디아스 부총리) 등 메르츠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수 성향의 기독민주당(CDU) 소속인 메르츠와 반대로 산체스는 좌파 정당 사회당을 이끌고 있다. 산체스는 트럼프의 반(反)이민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글을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기고하는 등 유럽 정치 지도자들 중에서 트럼프와 가장 대립적인 인물로 꼽힌다. 트럼프와 절친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그가 소유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산체스를 “더러운 폭군”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