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신고해주세요!”
지난달 15일 오후 5시15분쯤 수도권 등지로 향하는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승객들이 모여 있던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대합실에 한 승무원의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의자에서 급히 일어난 승무원은 맞은편에 있던 한 남성을 가리키며 주변에 도움을 청했고, 이를 목격한 한 중년 남성이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남성이 현장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주변 시민들이 그를 에워싸고 붙잡는 사이, 피해 승무원은 “이런 일을 한두 번 경험한 줄 아느냐. 휴대전화를 달라”고 소리쳤다. 처음에 범행을 부인하며 거부하던 남성은 인천공항경찰단이 도착할 때쯤 갑자기 태도를 바꿔 “휴대전화를 줄 테니 한 번만 봐달라”며 호소했다.
이 30대 남성은 최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휴대전화에는 벤치에 앉아있던 피해 승무원을 촬영한 사진이 여러 장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범행을 대부분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선 승무원 사이에서는 이 같은 불법 행위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는 하소연이 나온다. 실제 승무원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매년 반복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유니폼을 입은 채 출퇴근할 수밖에 없는 근무 환경 때문에 공항뿐 아니라 대중교통 등 이동 과정에서도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쉽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그러나 항공사 대응 체계는 대부분 기내에서 발생하는 불법 행위에 맞춰져 있어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5일 세계일보가 더불어민주당 이연희 의원실을 통해 국토교통부로부터 받은 ‘2021~2025년 승무원 관련 불법행위 연도별 건수와 유형’ 자료에 따르면 승무원을 대상으로 한 폭언 등 소란행위는 총 90건에 달했다. ‘성적 수치심 유발 행위’가 29건, ‘기타’ 항목이 18건이었으며 ‘음주 후 위해행위’와 ‘폭행 및 협박’이 각각 16건으로 집계됐다.
특히 기타 항목 중 ‘승무원 불법촬영’은 10건, ‘업무 방해’는 8건으로 나타났다. 앞선 사례와 같은 불법촬영 행위가 매년 평균 2건가량 발생하는 셈인데, 공항 대합실이나 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까지 고려하면 실제 건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승무원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는 여전히 기내 상황에만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유니폼을 입고 이동해야 하는 근무 환경 때문에 직업과 신원이 쉽게 노출된다는 점도 원인 중 하나로 언급된다.
국내 항공사 승무원 A씨는 “출퇴근길이나 공항에서 승무원을 노린 성범죄 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며 “특히 유니폼 때문에 더 쉽게 타깃이 된다. 승무원만을 노려 불법촬영하는 사람도 있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승무원 B씨도 “기내는 불법행위 관련 매뉴얼이 있지만 사실 범죄는 혼자 있을 때 더 많이 발생하지 않냐”며 “공항 안에서도 안전하다고 느끼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이와 관련해 국내 한 항공사 관계자는 “기내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명확한 규정과 매뉴얼이 마련돼 있지만, 공항 대합실 등 외부 공간까지 모든 영역을 관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다만 공항경찰단 등 수사기관의 요청이 있을 경우 최대한 협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구체적인 내부 매뉴얼을 밝힐 수는 없지만 항공기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는 원칙대로 조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항공업계는 승무원들이 겪는 범죄 피해에 따른 트라우마를 관리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대한항공은 2015년부터 사내 심리상담실인 ‘휴클리닉’으로 임직원이 겪은 다양한 충격으로부터 마음 건강을 보호하고 조기에 회복할 수 있도록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아시아나항공도 ‘오즈 휴포트 프로그램’으로 승무원의 심리 안정을 돕는다. 제주항공은 매달 넷째 주 뇌파·자율신경 균형 검사로 스트레스와 두뇌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승무원들은 사후 관리 못지않게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대책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편선화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 여성국장은 “승무원 유니폼을 성적 대상화하는 사회적 인식이 만연한데 별다른 탈의실이 없어 유니폼을 입고 출퇴근하는 것이 사실상 강제되고 있다”며 “승무원들이 외부에서 범죄 타깃이 되지 않도록 탈의실을 공항 등지에 마련하는 등 최소한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