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양국이 ‘동맹’이던 시절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시작했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그런데 일부 역사학자는 그 시기를 조금 앞당겨 잡기도 한다. 제국주의 일본이 1937년 7월 중국 침략에 나선 것을 2차대전 개전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났을 때 중국은 분명히 연합국의 일원이자 5대 전승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니 중일 전쟁 발발을 2차대전 시발점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중일 전쟁은 초기에는 당시만 해도 세계의 중심이던 유럽과 미국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다. 미국인과 유럽인들이 중일 전쟁에 주목한 것은 1941년 12월7일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 이후였다.

2차대전 도중인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의에 참석한 장제스 중국 국민정부 주석(왼쪽)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장제스가 연합국 전시 외교에서 존재감을 발휘한 첫 사례로 꼽힌다. 방송 화면 캡처

뒤늦게 2차대전에 뛰어든 미국은 추축국 공략의 우선 순위를 ‘선(先)독일, 후(後)일본’으로 정했다. 그렇다고 일본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중국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무기대여법에 따라 막대한 양의 군사 물자를 중국에 제공한 것은 물론 미군 장성을 보내 중국군을 지도하도록 했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연합국 정상회의가 열렸을 때 장제스(蔣介石) 중국 국민정부 주석은 미국의 주선으로 회의에 참석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전후 중국이 ‘강대국 클럽’이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에 들어간 것도 미국의 적극적인 후원 덕분이었다.

 

1949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져 대만 섬으로 쫓겨났다. 마오쩌둥은 새롭게 중화인민공화국(중공) 수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미국 행정부는 “대만이 곧 중국”이라며 중공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길 거부했다. 이듬해인 1950년 한반도에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터졌다. 남한을 돕고자 참전한 미군과 북한 편에 선 중공군 간에 격렬한 전투가 3년 가까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을 계기로 사실상 ‘무승부’로 끝났다. 미국은 1979년에야 중공을 승인하고 외교 관계도 수립했다. 1971년 이래 국제사회에서 통용돼 온 ‘중공=중국’이란 공식을 뒤늦게 받아들인 셈이다.

2025년 10월 경북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 참석차 한국에서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정상회담 개시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2차대전 종전 80주년인 2025년 “중·미 양국은 대전 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 맹우(盟友)”라며 “중국은 당시 미국 등 동맹국들의 소중한 지원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오늘날 툭하면 으르릉거리며 다투는 미·중이 한때 동맹이었다니, 그저 아련한 기억일 따름이다. 요즘 이란과 전쟁 중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호르무즈 해협 안정을 위해 중국이 군함을 파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16일에는 오는 31일∼4월2일로 예정됐던 방중을 1개월 연기한다고 밝히며 거듭 중국을 압박했다. 만약 시진핑이 트럼프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2차대전 이후 80여년 만에 군사 영역에서 미·중 연합이 성사되는 셈이다. 물론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