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소리가 어떻게 오늘을 바꾸는가 [이상권의 카덴자]

지난 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지휘자 존 엘리엇 가디너가 2024년 창단한 컨스텔레이션 합창단·오케스트라(CCO)와 함께 바흐의 b단조 미사를 올렸다. 거트 현이 서걱거렸고, 나무 관악기가 잔향 없이 또렷하게 울렸다. 무대 위에 선 것은 새 악단만이 아니었다. 오래된 음악을 오늘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반세기 넘도록 가디너가 품어 온 그 질문 자체가 객석을 향해 던져졌다. 

 

존 엘리엇 가디너와 컨스텔레이션 악단·합창단이 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바흐 b단조 미사 연주 후 관객 갈채를 받고 있다. ⓒStudioGut

학계가 ‘HIP(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라 부르는 시대연주는 ‘옛 악기로 옛 음악을 하는 일’쯤으로 오해되기 쉽다. 실제로는 그보다 넓고 까다롭다. 원전 악보와 서간, 이론서와 악기 실물, 당시의 기록을 대조하며 조율·주법·편성·발음·템포를 역사적으로 개연성 있는 범위 안에서 다시 조직하는 연구 기반의 해석이다. 핵심은 정답의 회수에 있지 않다. 남아 있는 근거 속에서 가능한 소리의 폭을 좁혀 가며, 작품이 한때 지녔던 말의 억양, 춤의 호흡, 수사학의 윤곽을 다시 묻는 데 있다.

 

왜 이런 수고를 하는가. 우선 음악을 더 선명하게 듣기 위해서다. 현대 악기의 두터운 음향 속에서 흐려지는 내성과 리듬, 아티큘레이션의 자음이 시대 악기 위에서는 또렷해진다. 그날 예술의전당에서 울린 거트 현의 마찰음은 단순한 복고가 아니었다. 현대 악기가 매끄럽게 지워 버리는 바흐의 대위법적 결을 청각 앞에 다시 펼쳐 놓는 행위였다. 또한, 작곡 당시 음향을 기준으로 작곡가의 의도를 명확히 이해하고, 이를 연구한 결과를 실제 연주에도 구현하기 위함이다. 

 

20세기 초 돌메치와 란도프스카가 고음악의 씨앗을 뿌렸고 전후에는 아르농쿠르와 레온하르트, 가디너 등이 시대 악기 앙상블을 하나의 미학으로 세웠다. 레퍼토리는 바로크에서 모차르트와 베토벤, 초기 낭만으로 넓어졌고, 오늘날에는 그 너머까지 뻗는다. 프랑수아 자비에 로트의 레 시에클이 당대 에라르 피아노와 관악기로 라벨과 스트라빈스키를 연주할 때, 청중이 듣는 것은 단순한 음색의 차이가 아니라 관현악법이 태어나던 순간의 물리적 상황까지 품고 있다. 즉 오늘날 시대 연주는 과거 연주 관행을 복원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상까지 반영하고 있다. 

 

이상권 음악평론가

물론 반론은 만만치 않다. 시대연주가 낭만주의적 상투성을 깨뜨렸지만, 정작 또 다른 상투성, 곧 가볍고 빠르고 건조한 ‘HIP 사운드’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이러한 회의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시대연주는 계속해서 음악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가장 의미 있는 업적은,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을 비판하던 현대 악기 연주의 관행을 바꿔 놓았다는 데 있다. 오늘날 세계 주요 교향악단도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를 연주할 때 무차별적 비브라토를 남용하지 않는다. 보잉은 가벼워졌고, 텍스처는 투명해졌으며, 악구의 호흡은 한결 민첩해졌다. 시대연주가 던진 물음이 현대 연주자들의 귀까지 바꿔 놓은 것이다. 즉 시대연주는 하나의 분파에 머물지 않고 고전음악이 자기 습관을 의심하게 만드는 비판적 장치가 되었다.

 

이날 b단조 미사의 마지막 합창 ‘평화를 주소서’가 끝났을 때, 객석은 잠시 정적에 잠겼다. 300년 전의 음향을 향한 탐색이 2026년의 청중에게 닿는 순간, 그 소리는 단순한 재현을 넘어 현재의 감각 속에서 새롭게 살아났다. 시대연주의 가치는 과거의 정답을 복원하는 데 있지 않다. 서로 다른 해석이 부딪히고 갱신되는 과정 속에서, 악보 속 음표들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는 데 있다. 결국 악보는 완결된 유물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읽혀야 할 살아 있는 문장이다. 그리고 그 문장을 어떻게 발화할 것인가는, 여전히 오늘의 연주자와 청중에게 열려 있다. 시대연주가 던진 질문은 언제나 무대라는 현재를 향해 열려 있다.

 

이상권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