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49년 4월 15일 경남 진해의 옛 덕산 비행장에서 창설됐다. 당시 국방부는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을 감안할 때 상륙작전을 수행할 부대가 필요하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출범 당시 해병대는 해군에서 넘어 온 장교 26명과 부사관 54명, 병 300명 등 380명으로 구성된 대대급 소부대였다. 초대 사령관(신현준)의 계급도 중령에 불과했다. 3만명 가까운 병력을 거느리고 3성 장군(중장)의 지휘를 받는 오늘날의 해병대사령부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드는 대목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해병대에 육·해·공군 못지않은 독립성을 부여해 ‘준(準) 4군 체제’를 만들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6·25 전쟁 당시 해병대는 북괴군과 중공군을 무찌르며 막강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통영 상륙작전(1950년 8월 17일∼9월 22일), 도솔산 지구 전투(1951년 6월 4∼20일), 장단 지구 전투(1952년 3월 17일∼1953년 7월 27일) 등이 대표적이다. 오죽하면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미국을 도와 월남(越南)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참전한 베트남 전쟁에서도 해병대는 엄청난 용기와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줬다. 1969년 제7대 해병대사령관이던 강기천 장군이 중장에서 대장으로 진급한 이래 1973년까지 사령관 계급이 대장으로 유지된 것은 한국군에서 해병대가 차지하는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신 직후인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적으로 군을 관리·운영해야 한다”며 해병대 해체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해병대사령부는 사라지고 해군본부가 직접 해병대를 지휘하게 됐다. 대신 해군참모총장 밑에 두 명의 참모차장(중장)을 둬 1참모차장이 해군, 2참모차장은 해병대를 각각 관할하게끔 했다. 예전의 해병대사령관이 ‘해군 제2참모차장’으로 사실상 격하된 셈이다. 이를 두고 육군 출신인 박 대통령이 육군과 성격이 비슷한 해병대의 성장을 견제한 조치로 여기는 시각이 우세한 듯하다. 5공화국 시절인 1987년까지 14년간 총 8명의 해병 중장이 해군 제2참모차장 직위를 거쳐 갔다. 정확한 보직명은 해군참모차장이었으나 현재 이들은 모두 전직 해병대사령관으로서의 예우를 받는다.
월남전 참전용사로 1984년 9월부터 2년간 해군 제2참모차장을 지낸 성병문 예비역 해병 중장이 지난 16일 9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재임 시절 불편한 관계인 해군본부를 건너뛰고 5공 군부의 핵심 실세들과 몰래 만나 “해병대사령부 재창설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성 장군의 끈질기고 집요한 설득은 마침내 전두환 대통령까지 움직였다. 1986년 8월 청와대는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등에 해병대사령부 재창설을 지시했다. 1년이 넘는 오랜 준비 끝에 1987년 11월 해병대사령부가 다시 출범했을 때 성 장군은 전역한 뒤였고, 당시 해군 제2참모차장이던 박구일 중장이 14년 만에 부활한 해병대사령관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비록 현실에선 해군참모차장을 역임했지만 오늘날 해병 역사엔 ‘제16대 해병대사령관’으로 기록된 성 장군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