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원·달러 환율 종가가 금융위기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1500원을 찍었다. 이란·이스라엘이 서로 가스 시설을 폭격하고 국제유가가 110달러까지 뚫자 환율이 ‘심리적 저항선’을 넘어섰다. 당국은 즉시 구두개입에 나서며 시장을 진정시켰지만 이란전쟁이 지속되는 한 고환율 흐름이 꺾이지 않으리란 전망이 우세하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17.9원 오른 1501.0원(오후 3시30분 기준)에 주간거래를 마쳤다. 이는 주간거래 종가 기준으로 2009년 3월10일(1511.5원)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날 환율은 중동발 악재에 대폭 밀어올려졌다. 간밤 이스라엘이 이란 최대 가스전을 폭격하자 이란이 카타르 가스 시설 밀집지역 공격으로 맞섰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유가가 100달러를 돌파했다. 국제유가 기준인 브렌트유 5월 인도분 선물 종가는 배럴당 107.38달러로 전장보다 3.8% 올랐다. 브렌트유는 종가 산출 이후에도 상승폭을 키워 오후 4시40분 기준 113.49달러를 기록했다. 브렌트유가 장중 배럴당 110달러대로 올라선 것은 9일 만이다. 4월 인도분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종가는 배럴당 96.32달러로 0.1% 상승했다. WTI 선물은 장중 한때 배럴당 100.5달러까지 치솟았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2회 연속 동결하며 매파적(통화긴축 선호) 기조를 밝혀 원화 약세에 기름을 부었다. 이란전쟁에서 ‘안전 피난처’가 된 달러는 연일 강세를 이어갔다. 주요 6개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이날 오후 4시40분 기준 100.16으로 이틀 연속 100을 넘어섰다. 미국이 연내 기준금리를 내릴 가능성이 줄어들면서 글로벌 금융 플랫폼 인베스팅닷컴이 집계한 국제 금 현물 시세는 이날 오후 4시40분 기준 온스(oz)당 4741.38달러로 하락했다.
이에 서울 시장 개장과 동시에 환율은 전날 주간거래 종가보다 21.9원 오른 1505.0원에 출발했다. 주간거래 장중 기준으로 금융위기 때인 2009년 3월10일(1561.0원)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유정 하나은행 선임연구원은 “환율이 장 초반 1500원을 넘어서자 기업들이 달러 매도에 나서 수급에 영향을 주고 당국에서 구두개입도 나와 장중 1500원 전후로 왔다 갔다 했다”고 전했다.
이날 오전 환율 적신호가 커지자 당국은 즉시 구두개입을 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날 열린 ‘확대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외환시장도 각별히 경계감을 가지고 시장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면서 “원화의 흐름이 펀더멘털과 과도하게 괴리되는 경우 적기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구 부총리는 “이와 관련, 세법이 국회 법사위를 통과한 국내시장복귀계좌(RIA)와 개인투자용 선물환 매도 상품은 3월 중 출시하고, 법 통과 후 후속입법을 신속히 완료하겠다”면서 “국내투자 복귀시점에 따라 해외주식 양도소득세 공제율이 5월까지 복귀하면 100%, 7월까지 80%, 연말까지 50%로 정해진 만큼 투자자 여러분이 국내 시장으로 조속히 복귀해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유상대 한국은행 부총재도 이날 오전 ‘시장 상황 점검 회의’를 주재하고 “금융·외환시장의 큰 변동성이 지속되고 있다”며 “필요시 시장안정화조치 등을 통해 적기에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정부가 1500원을 환율 마지노선으로 여기는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고환율이 잡히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문정희 KB국민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전쟁이 계속되고 유가가 100달러를 넘어가면 환율이 내려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악재에 대한) 민감도는 약해져 장중 변동성은 줄겠지만, 고환율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유가가 85∼110달러일 경우 환율 상하단은 1470∼1510원, 유가가 130달러까지 가면 1510원 이상 오를 여력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고유가·고환율로 인한 물가 상승은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환율은 한 달 정도 시차를 두고 수입물가에 영향을 미치고 소비자물가에 전이되기까지는 3개월 정도 걸린다”며 “유가가 연평균 10% 오르면 평균 물가는 0.2%포인트 오르는데 현재 정부가 각종 대책을 내놓고 있어 물가 상승분이 절반 정도 상쇄될 듯하다”고 분석했다.
블룸버그 이코노미스트 권효성 박사는 이날 금융투자협회 ‘호르무즈 위기 긴급 세미나’에서 “현재 물가는 목표치인 2% 부근에서 안정적이지만, 유가가 (평균) 108달러를 넘어서고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에 진입하는 ‘비관적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경우 한은은 인플레이션 기대를 억제하기 위해 이르면 3분기부터 금리 인상을 단행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날 확대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참석자들은 금융·외환시장의 변동성이 지속되고 있다며 24시간 모니터링 체계를 가동해 필요시 정부와 한은이 공조해 적기에 시장안정 조치를 취하는 데 뜻을 모았다.
아울러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금융권 전반을 대상으로 환율, 주가, 금리, 유가 등 다양한 변수의 충격 시나리오를 가정한 스트레스 테스트를 실시해 위기대응 능력을 점검·확충하는 한편 100조원+α 규모의 시장안정 프로그램의 확대를 선제적으로 준비하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는 이창용 한은 총재, 이찬진 금융감독원장,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