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 면전에서 85년 전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거론했다. 2016년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함께 진주만을 방문한 것으로 양국의 과거사 문제는 매듭지어진 것으로 여겨 온 일본 정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트럼프는 19일(현지시간) 미국을 방문한 다카이치와 백악관에서 만나 미·일 정상회담을 했다. 그런데 어느 일본 취재진이 트럼프를 향해 ‘왜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국에 이란 공격을 사전에 통보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지난 2월28일 이란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당시 86세)를 제거한 공습 직전 일본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트럼프는 “우리는 ‘서프라이즈’(surprise·깜짝 놀랄 일)를 원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어 “누가 일본보다 서프라이즈를 더 잘 알겠느냐”며 “당신은 왜 나에게 진주만에 대해 말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다카이치는 트럼프가 진주만을 언급하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1941년 12월7일 일본군은 항공모함 6척을 동원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공격했다. 이 사태로 미국 군인과 민간인 등 24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은 이 사태를 계기로 연합국 일원으로 참전해 일본, 독일 등 추축국들과 싸우게 된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은 1945년 9월2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인 2016년 12월 퇴임을 앞둔 오바마가 아베와 함께 진주만을 찾았다. 아베는 공습 당시 침몰한 미 해군 함정 ‘USS 애리조나’를 기념하는 공간을 찾아 헌화하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백악관은 “과거 적이었던 두 나라가 공통의 이익과 가치를 통해 동맹을 강화하는 자리가 되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일본 정부도 이로써 미국과의 과거사 문제가 깨끗이 정리되었다고 판단해 커다란 외교적 업적이란 평가를 내렸다.
그런데 이듬해인 2017년 취임한 트럼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주만을 거론하고 있다. 일본 방문을 앞둔 2017년 11월 트럼프는 일부러 하와이를 경유하는 길을 택했다. 짧게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진주만을 기억하라. (침몰한) 애리조나함을 기억하라”는 게시물을 올렸다. 이를 일본에 대한 모종의 압박으로 받아들인 일본 정부는 충격 속에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2018년 6월 아베가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트럼프는 정상회담 도중 “2차대전 당시 진주만 공습을 잊지 않는다”며 일본의 통상 정책을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5년 11월 야당인 민주당의 반대로 예산안 통과가 지연돼 연방정부 ‘셧다운’(일부 기능 정지)이 벌어졌을 때 트럼프는 민주당 의원들을 일본 가미카제(神風) 조종사에 비유했다. 가미카제란 2차대전 말기 패색이 짙어진 일본군 조종사들이 군용기를 몰고 미군 함정에 돌진한 ‘자살 공격’을 일컫는다.
2025년 12월 2기 행정부 들어 처음 ‘진주만 추모의 날’을 맞은 트럼프는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의도는 미국의 정신을 말살하는 것이었지만, 그 치명적 공격은 되레 미국인들의 시민의식을 결집시키고 결의를 북돋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 국민을 향해 “진주만에서 희생된 군인 및 민간인들을 항상 기억하고 기려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