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매’ K헤리티지… 세계가 'ARIRANG' 에 빠진다

K팝에 녹아든 한국 문화유산

사물놀이·탈춤 녹인 BTS ‘아이돌’
‘얼씨구’ 한국어 떼창 세계에 알려

130년 전 美서 울려 퍼진 ‘아리랑’
정규5집 콘셉트·서사 활용 돋보여
‘성덕대왕신종’ 문양의 뮷즈 눈길
“가수의 모든 것 K컬처 되는 시대”

1896년 미국 워싱턴 하워드대학교. 낯선 땅, 축음기 앞에 둘러앉은 일곱 명의 조선 청년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아리랑’을 녹음한다. 130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일곱 청년이 등장한다. 세계를 무대로 선 방탄소년단(BTS)이다. 서로 다른 시대의 두 장면이 겹치면서 ‘아리랑’은 타향살이의 설움에서 세계를 향한 우리의 목소리로 다시 태어난다. 최근 공개된 BTS 정규 5집 ‘아리랑’ 애니메이션 트레일러는 한국적인 정체성이 시대의 언어로 부상한 순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8일(현지시간) 방탄소년단(BTS)의 정규 5집 ‘아리랑’(ARIRANG) 발표를 앞두고 미국 뉴욕 브루클린 브리지 상공에서 방탄소년단의 컴백을 기념하는 드론쇼가 진행되고 있다.
빅히트뮤직 제공

K팝이 한국적인 정서와 전통을 결합해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내며 글로벌 시장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변방에서 온 K팝이 세계 대중문화의 흐름을 이끄는 중심에 서면서다. 21일 밤 BTS가 경복궁 내부 근정문에서 출발해 흥례문, 광화문로 이어지는 ‘왕의 길’을 걸어 나오는 장면은 한국의 전통과 문화유산이 K팝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K헤리티지’ 흐름의 정점을 상징한다.

K팝과 전통문화의 결합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꼬를 튼 이는 역시 BTS였다. 이들은 2018년 사물놀이와 탈춤이 가미된 ‘아이돌(IDOL)’로 ‘얼씨구’, ‘지화자 좋다’ 같은 한국어 ‘떼창’을 세계 무대에 울려 퍼지게 했다. 멤버 슈가는 솔로곡 ‘대취타’에서 조선시대 군례악을 힙합 비트와 결합하고, 곤룡포를 응용한 의상과 궁궐을 배경으로 전통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드러냈다.

이후 한국 전통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콘셉트와 서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번 앨범에서 BTS는 ‘아리랑’을 전면에 내세워 한국적 정서를 하나의 콘셉트로 밀어붙였고, 전통과 K팝의 결합을 한층 끌어올렸다. 앨범 로고는 아리랑의 초성 ‘ㅇㄹㄹ’과 태극기의 건곤감리 괘상을 결합했으며, ‘BTS 더 컴백 라이브 | 아리랑’의 360도 스타디움 콘서트 무대도 태극기를 형상화했다.



블랙핑크도 K헤리티지 확산의 흐름에 힘을 보탰다. 지난달 새 앨범 출시를 기념해 국립중앙박물관과 진행한 대규모 협업은 문화유산이 K팝과 결합해 새로운 문화적 플랫폼으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박물관 외관이 블랙핑크의 상징색인 핑크빛으로 물들었고, 관람객은 경천사 십층석탑, 금동반가사유상 같은 국보급 유물 해설을 블랙핑크 멤버들의 목소리(한국어·영어·태국어)로 들을 수 있었다. K팝 스타가 정적인 공간 박물관을 전 세계 팬들이 향유하는 역동적인 성지로 바꿔 놓은 것이다. 이보다 앞서 기와지붕 세트와 부채춤, 철릭(조선시대 무관 의복)을 연상케 하는 한복 의상 등으로 꾸며진 2023년 블랙핑크의 코첼라 무대는 미국 CNN방송이 “한국 유산에 대한 경의”라고 조명할 만큼 한국적 미학의 정수를 보여줬다.

 

K헤리티지의 물결은 K팝 음악을 넘어 콘텐츠 산업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 K팝을 소재로 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는 지난 16일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2관왕에 올랐다. 주제가상을 수상한 이재는 대한제국 황실 대례복에서 영감을 받은 드레스를 입고 트로피를 받아들었다.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와 미학이 세계 최고 권위의 무대를 장악한 순간이었다.

K팝이 주도한 K헤리티지 신드롬은 한국 전통 문화유산에 대한 실질적인 관심 확대로 이어졌다. K팝 팬덤이 문화유산 소비의 새로운 주체로 부상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개관 이래 처음으로 관람객 600만명 시대를 열었다. ‘케데헌’의 인기에 힘입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박물관 상품 ‘뮷즈’ 열풍이 맞물린 결과다. 경복궁 별빛야행·창덕궁 달빛기행 등 고궁 체험 프로그램 예약인 ‘궁케팅’ 경쟁도 아이돌 콘서트 티켓 예매만큼 치열해졌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번 광화문 공연에서도 K헤리티지의 확산은 무대 밖으로 이어진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은 하이브와 손잡고 통일신라 국보 ‘성덕대왕신종’ 문양을 활용한 기념 상품을 내놓았고, 국가유산진흥원은 경복궁 내 ‘K헤리티지 스토어’에서 아리랑과 경복궁을 주제로 한 전통문화 굿즈를 선보이고 있다. BTS 컴백 공연을 계기로 경복궁 근정전 촬영 동선이 공개되자 전 세계 팬들의 성지순례 열풍이 본격화될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BTS나 블랙핑크 같은 스타들이 우리 전통문화를 자연스럽게 보여줄 때 그 효과와 파급력은 어떤 홍보물보다 훨씬 크다”며 “아티스트의 일거수일투족이 곧 K컬처가 되는 시대”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