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가득 채워주세요.”
정오의 햇살이 내리쬐는 오피스가 인근 카페. 직장인들의 손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투명한 플라스틱 컵이 들려 있다. 빨대를 타고 올라오는 차가운 카페인이 오후의 나른함을 잠시 씻어내는 사이, 우리 뇌는 그날 밤 충분히 쉬지 못할 가능성까지 함께 떠안을 수 있다.
점심 식사 후 무심코 들이킨 이 한 잔이 밤사이 뇌가 완전히 이완되지 못하는 이른바 ‘공회전 수면’으로 불리는 현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리 사회의 수면 지표에서도 이미 경고 신호는 뚜렷하다.
23일 국민건강보험공단 진료 데이터에 따르면 수면장애로 병원을 찾는 환자는 최근 연간 약 70만명 내외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관련 총진료비 역시 2022년 기준 2000억원대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나 수면 문제가 개인의 피로를 넘어 사회적 의료 부담으로 확산되는 흐름이 감지된다.
질병관리청 국민건강영양조사에서는 국내 성인 약 30%가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이 6시간 이하에 머무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가데이터처 생활시간 조사에서도 전반적인 수면 시간 감소 경향이 관찰되는 등 만성적인 수면 부족 구조가 생활 전반에 자리 잡는 양상이 나타난다.
여기에 일상화된 카페인 섭취 습관이 수면 환경 변화의 주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식생활 조사 결과 성인의 커피 섭취 경험률은 70%를 웃돌고, 특히 20대의 카페인 음료 경험률은 약 90%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처럼 카페인이 실제 수면 중 뇌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핀 해외 연구도 생활습관 관리 참고 자료로 활용 가능성이 제기된다.
캐나다 몬트리올대학교 인지·계산 신경과학 연구소(CoCo Lab)와 퀘벡 인공지능 연구소(Mila) 공동 연구팀의 관련 논문은 국제 학술지 ‘커뮤니케이션 바이올로지’에 게재됐다.
다만 해당 연구는 성인 4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소규모 실험으로 생활 참고 수준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한계도 함께 제시됐다.
◆뇌는 ‘균형 상태’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회복
연구진은 뇌 활동이 지나친 각성이나 억제가 아닌 ‘임계성(criticality)’ 상태일 때 가장 안정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회복 기능을 수행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여러 악기가 조화를 이루며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와 유사한 상태로 비유된다.
문제는 카페인에 의해 각성 신호가 강화될 경우 수면 중에도 이러한 균형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낮 동안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카페인이 밤에는 뇌의 완전한 이완을 방해해 회복 효율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연구진의 분석이다.
수면의학 전문가는 “충분한 시간 잠자리에 누워 있었는데도 아침 피로가 남아 있다면 깊은 수면 단계 진입이 원활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며 “카페인은 일시적으로 각성을 돕지만 피로 자체를 해결해주는 요소는 아니다”고 설명했다.
◆깊은 수면 줄고 ‘각성형 뇌파’ 증가 경향
실험에서는 취침 전 카페인을 섭취한 집단에서 야간 뇌 활동의 불규칙성이 증가하는 흐름이 관찰됐다. 인지 기능 회복과 관련된 비렘(NREM) 수면 단계에서 느린 뇌파 활동은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반면, 각성 상태에서 증가하는 베타파 성향 신호는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는 밤사이 이뤄지는 뇌 회복의 질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으로 해석된다.
직장인 이모(34) 씨는 “오후 업무를 위해 마신 커피가 밤까지 이어지는 각성 상태를 만들고, 다음 날 다시 카페인에 의존하는 악순환을 경험했다”며 “잠은 시간보다 깊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하루 6시간 이하 수면이 장기간 지속될 경우 심혈관 질환 등 건강 위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수면은 뇌 노폐물 배출 과정과도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만성적인 수면 부족이 장기적인 인지 건강에 영향을 줄 가능성도 제기된다.
◆젊을수록 민감…오후 2시 ‘카페인 셔터’ 필요
연령별 분석에서는 젊은 성인 집단에서 카페인에 따른 뇌파 변화가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나는 경향이 관찰됐다. 카페인 대사 속도와 신경전달물질 수용체 반응성 차이가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제시된다.
일반적으로 카페인의 체내 반감기는 약 5~6시간 수준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면의학계에서는 이를 고려해 ‘오후 2시 이후 섭취 제한’을 생활 권고선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점심 이후 습관적인 커피 섭취가 늦은 밤까지 각성 효과를 이어지게 할 수 있다는 의미다. 퇴근길 카페 앞 줄을 지나치며 오늘 한 잔을 줄인 선택이 내일 아침 출근길의 피로를 바꿀 수도 있다.
[수면 질 높이는 카페인 생활 가이드]
수면의학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생활 수칙을 권고한다.
△‘오후 2시’ 셔터 내리기: 취침 약 8~10시간 전에는 카페인 섭취를 줄이는 것이 깊은 수면 형성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커피 한 잔 + 물 두 잔’: 충분한 수분 섭취는 체내 카페인 농도 조절과 배출 과정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비타민B·마그네슘 관리: 멜라토닌 합성과 신경 안정에 관여하는 영양소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디카페인의 함정: 소량의 카페인도 민감한 사람에게는 각성 요인이 될 수 있어 늦은 시간 섭취 조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