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원 한글학회장 “한글, 단순 문자 아닌 세계인 함께 누리는 유산” [차 한잔 나누며]

형태 자체 아름다움·독창성 표현
K컬처 열풍 한가운데 자리매김
올 반포 580돌·한글날 100주년
“국민 모두 자긍심 갖고 아껴주길”

올해는 두 개의 숫자가 겹치는 해다. 한글이 세상에 나온 지 580돌, 그리고 한글날이 기념일로 지정된 지 꼭 100년. 그사이 서울의 말을 프랑스 파리와 브라질 상파울루 젊은이들이 따라 읊는 시대가 됐다. 일제강점기 한글운동의 구심점이자 국내 최초 민간 학술단체인 한글학회의 김주원 회장은 25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한글’이라는 두 글자에 각별한 무게를 뒀다. 김 회장은 “한글을 단순한 문자로만 보지 말아 달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글은 대한민국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를 이끈 원동력이자 이제는 전 세계인이 함께 누리는 문화유산이 됐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한글운동의 구심점이자 국내 최초 민간 학술단체인 한글학회의 김주원 회장. 김 회장은 최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국민이 한글에 자긍심을 가져야 한국어 열풍이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글학회 제공

“이제 한국어가 대세다(Korean is cool now).” 최근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미국 내 한국어 열풍을 집중 조명하며 이같이 보도했다. 미국 대학의 외국어 수강생이 16%가량 줄어드는 가운데 한국어 수강생은 38% 급증하면서 주요 대학들이 한국어 강좌를 확대한다는 것이다. 유튜브와 틱톡에도 K팝 노래의 한국어 발음과 가사를 설명하는 콘텐츠가 넘쳐난다.

김 회장은 이처럼 K컬처 열풍 한가운데에 한글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한글은 그 형태 자체로 아름다움과 독창성을 드러냅니다. 그 시각적 매력이 외국인의 관심을 끄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는 한국어 열풍의 지속 가능성은 정부가 아닌 국민에게 달려 있다고 본다.



“우리 국민이 한국어 한글에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홍보대사가 돼 한국어 한글을 자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져야 이 열풍이 지속되고 발전될 수 있어요.”

김 회장은 한글이 가진 문자로서의 본질적인 힘을 먼저 짚었다. 전 세계에는 7000여개의 언어가 존재하지만 현재 쓰이는 문자는 약 50개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서도 한글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김 회장은 “모음과 자음을 다 갖추고 있어 음성 표현력이 가장 뛰어난 음소문자는 전 세계에 열 개 정도밖에 없는데, 한글이 여기 속한다”며 “더 중요한 건, 전 세계 거의 모든 문자는 기존 문자에서 발달한 것인 데 비해, 한글은 창제된 문자라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고, 소리가 세어질수록 획을 더하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로마자에서 g와 k가 전혀 다른 모양인 것과 달리, 한글에서 ‘ㄱ’과 ‘ㅋ’이 닮은 것도 그 때문이다. 모음은 천지인의 철학을 담으면서도 한국어 특유의 모음조화를 문자 모양 안에 반영했다.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이 문자 덕분에 한국은 문맹률 0%에 가까운 나라가 됐다. 한글의 가능성은 한국어 너머로도 확장된다. 음소문자로서 한글은 세계 여러 언어를 표기할 수 있어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를 살리고, 문자 없는 언어를 기록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김 회장은 “이미 국내에 이 연구를 전담하는 연구소가 세워져 있다”며 “이제 한글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9년 인도네시아의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은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할 문자로 한글을 채택했다. 최근에는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검열을 피하기 위해 자국어를 한글로 표기해 반정부 목소리를 낸 것이 화제가 됐다.

그런데 정작 국내에서는 청소년 문해력 저하가 사회문제로 불거지고 있다. 짧은 영상 콘텐츠에 익숙해지고, 인공지능(AI)이 사고와 표현을 대체해 주면서 읽기와 쓰기 능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 회장은 이 현상의 뿌리를 훨씬 오래된 곳에서 찾는다.

“이 현상은 1000년을 이어온 문화 충돌의 결과입니다. 중국 문명과 1000년을 접촉하면서 한자와 한문만 숭상하다 보니 우리 어휘의 60%가 중국어 어원의 말이 된 거예요.”

그나마 문법은 한국어 고유의 뼈대를 지켰다는 게 위안이다. 처방은 간단하다. ‘AI’보다 ‘인공지능’, ‘QR코드’보다 ‘정보무늬’처럼 어렵고 낯선 말을 쉬운 우리말로 바꿔 쓰는 것이다. 김 회장은 “비록 길어지고 세련되지 않은 느낌이 들더라도, 공공언어만큼은 시골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알아들을 수 있게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최근 광화문 한글 현판 논의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경복궁은 한글이 탄생한 곳이고, 광화문은 그 정문입니다. 조선 건물에 한자 현판이 달린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만을 고수할 필요는 없어요. 문화유산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계승 발전시키려 한다면, 한글이 탄생한 경복궁의 정문에 한글 현판을 다는 것은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김 회장은 경복궁과 광화문 어디에도 ‘한글의 탄생지’라는 표지판 하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지난 21일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방탄소년단 공연이 전 세계에 생중계된 상황을 거론하며, “한자로 된 현판이 전 세계에 비쳤을 것을 생각하면 자괴감이 든다”며 “그날 빛(미디어 파사드)으로라도 한글 ‘광화문’을 쏘아 올렸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