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은마아파트, 중구 소공동 캡슐 호텔, 송파구 장미아파트….
최근 한 달 새 화재가 난 곳들이다. 공통점은 또 있다. 화재 초기 진압에 효과적인 스프링클러가 없다는 것. 이 때문에 은마아파트에선 고등학생이, 소공동 캡슐 호텔에선 중상을 입은 일본인이 끝내 숨졌다.
이처럼 스프링클러가 없는 시설에서 화재가 잇따르면서 일각에선 정부 지원으로 기존 시설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다만 최소 비용이 2조2500억원으로 추산되는 등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대신 노후 아파트에 스파크를 감지해 전기를 자동으로 차단하는 아크차단기, 숙박 시설엔 간이 완강기를 비치하는 현실적 대안을 적용하자는 제언이 나온다.
28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의원이 소방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아파트 화재 3289건 중 41건에서 사망자 52명이 발생했는데, 이 중 32건의 41명(78.8%)은 스프링클러가 없는 아파트에서 나왔다.
전국 아파트 단지 절반은 화재 사각지대에 있다. 지난해 하반기 소방청 조사 결과, 전체 4만9810단지 중 2만4285단지(48.8%)만 스프링클러를 갖춘 것으로 확인됐다. 나머지 1만9989단지(40.1%)는 스프링클러가 전혀 없고, 5536단지(11.1%)는 일부 층에만 있다.
스프링클러 미설치(일부 층 미설치 포함) 아파트 단지는 경기도가 4619단지로 가장 많다. 이어 서울 3175단지, 부산 2593단지, 경북 2109단지, 경남 1927단지 등 순이다.
또 전체 숙박 시설 2만8029곳 중 9.7%인 2707곳에만 스프링클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화재 시 인명 피해가 큰 이유다. 최근 5년간 숙박 시설 화재 1829건이 발생해 38명이 숨지고 325명이 다쳤다.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 대상 아파트는 1990년 16층 이상에 적용되기 시작해 2005년 11층 이상, 2018년 6층 이상으로 확대됐다. 숙박 시설의 경우엔 2004년 11층 이상, 2017년 6층 이상, 2022년 바닥 면적 합계 600㎡ 이상으로 확대됐다.
이와 관련해 국회엔 기존 숙박 시설 등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게 하는 ‘소방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 3건이 발의돼 행안위에 계류 중이다. 설치 비용 전부나 일부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문제는 이미 건축이 완료된 공동주택, 숙박 시설 등 특정소방대상물에 강화된 기준이 소급 적용될 경우 모든 특정소방대상물이 대상이 된다는 데 있다. 지난해 1월 기준 스프링클러 등 소방시설 설치 의무가 있는 특정소방대상물은 266만449개소에 달한다. 이 때문에 행안위 법안심사제2소위원회에선 “적용 대상이 지나치게 광범위한 것은 아닌지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소방청도 이 법안들에 대해 ‘신중 검토’ 의견을 냈다. 스프링클러 설치엔 면적 1000㎡ 기준 9000만원 정도 드는데,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은 숙박 시설 약 2만5000곳 설치에만 2조2500억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방청은 또 기존 시설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려면 천장을 철거하고 배관을 설치해야 하는데, 층고가 낮아져 설치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생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스프링클러에 필요한 최소 16t 이상의 수조와 펌프를 설치하기 위한 공간을 확보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기획재정부도 소방시설 설치는 수혜자 부담 원칙에 따라 소유자 등이 비용을 부담하는 게 타당하다며 신중 검토 의견을 냈다.
이와 관련해 권칠승 의원은 “기존 건축물에 스프링클러를 즉시 설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이제는 보다 유연하고 실용적인 대안들을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며 “기존 건축물의 구조적 한계와 재정적 부담이 큰 전면 교체 방식 외에도, 노후 아파트의 전기 화재를 선제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아크차단기 설치나 숙박 시설 투숙객 수에 맞춘 간이 완강기 비치 등 즉각 실행 가능한 보완책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권 의원은 이어 “일률적인 강제 규제보다는 지방세 감면이나 보험료 할인 같은 실질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해 민간의 자율 참여를 끌어내는 것이, 현시점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속도감 있게 안전망을 구축하는 길일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