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유엔 사무총장을 뽑기 위한 외교전이 뜻밖의 복병과 마주했다. 유력 후보자의 모국(母國)이 돌연 “우리나라 국적자를 포함해 아무도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자국 정부조차 외면하는 이가 유엔 사무총장에 오르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치열할 것으로 예상됐던 선거전이 의외로 싱겁게 끝날 가능성마저 제기된다.
31일(현지시간) 외신에 따르면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신임 칠레 대통령은 최근 유엔 사무총장 유력 후보인 미첼 바첼레트(74) 전 칠레 대통령에 대한 지지 의사를 전격 철회했다. 카스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뜻을 함께하는 강성 보수 인사인 반면 바첼레트는 좌파 정치인이다.
대륙별 안배 원칙에 따라 차기 유엔 사무총장은 중남미·카리브 국가 출신 인사들 중에서 배출될 예정이다. 카스트 대통령은 “(중남미) 대륙 내 후보 분열로 바첼레트가 선출될 가능성이 낮다”며 “당선 가능성이 불확실한 가운데 수개월 동안 진행될 경선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제는 중남미에서 발언권이 무척 강한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 멕시코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 등이 이미 바첼레트 지지를 선언했다는 점이다. 이에 카스트 대통령은 “바첼레트 후보가 브라질과 멕시코의 지지를 바탕으로 도전을 계속하는 것은 그녀의 자유”라며 “칠레 정부가 다른 국가 출신 후보를 지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바첼레트는 학창 시절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사 정권에 저항했던 운동권 출신이다. 진보 정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2006년 칠레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마침 올해 유엔 창설 81주년을 맞아 국제사회에선 “이제 여성 사무총장이 나올 때가 되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근 국빈으로 한국을 방문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바첼레트를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장관의 딸”이라고 소개하며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다. 칠레 정부의 지지 철회 선언 직후 바첼레트는 성명에서 “나를 추천한 브라질·멕시코 정부와 함께하겠다”며 유엔 사무총장 선거전 완주 의지를 드러냈다.
바첼레트와 치열하게 경합 중인 다른 유엔 사무총장 후보는 라파엘 그로시(65)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다. 그로시는 아르헨티나 외교관 출신으로, 2019년부터 IAEA 사무총장을 맡아 국제사회에서 인지도가 높다. 핵무기 비확산 및 비핵화 신념이 뚜렷한 그로시가 유엔을 이끈다면 북핵 문제와 관련해 뭔가 진전된 해법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그로시는 한국와 약간의 ‘악연’이 있다. 2023년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나서기 직전 IAEA는 ‘일본의 조치가 국제 안전 기준에 부합한다’는 취지의 검증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그로시는 직접 한국을 찾아 설득 노력을 전개했으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로부터 “일본 편만 든다”는 반발을 샀다.
한국이 장차 핵 추진 잠수함(핵잠)을 도입하려면 IAEA의 도움과 협조가 필수적이다. 일각에선 그로시가 4월 중 방한해 핵잠 관련 제반 문제를 놓고 한국 정부와 긴밀히 협의할 것이란 관측을 제기했다. 바첼레트 측이 칠레 정부의 지지 철회로 큰 타격을 입은 가운데 그로시의 유엔 사무총장 입성을 점치는 목소리에 무게가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