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YS) 대통령은 1993년 2월25일 취임식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외쳤다. 이어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해외 동포들을 향해선 “금세기 안에 조국은 통일되어 자유와 평화의 고향 땅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남북 통일에 대한 지나친 낙관도 무척 놀라웠지만, ‘동맹’(미국)보다 ‘민족’(북한)이 먼저라는 견해는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진보 진영은 ‘YS가 보수인 줄 알았는데 전향적 측면도 있구나’ 하고 반겼다. 반면 보수층은 ‘우리가 YS를 잘못 봤나’ 하며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20세기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이란 YS의 장담은 허언(虛言)에 그치고 말았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YS는 1990년대 들어 북한에 닥친 극심한 식량난에 주목한 것 같다. 도미노처럼 쓰러진 동유럽 옛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북한도 곧 망할 것이라고 단정한 듯하다. 1995년 들어 YS는 북한에 쌀 제공 의사를 밝혔고 북한 정권도 이를 수락했다.
그해 8월 이재춘 외무부(현 외교부) 차관보가 이끄는 우리 대표단은 하와이에서 미국 대표단과 만나 50주년 광복절을 기념해 북한에 제안할 유화(宥和) 정책을 협의했다. 그런데 논의가 시작되자마자 한국 대표단에 느닷없는 ‘철수령’이 떨어졌다. 쌀을 배에 싣고 북한 청진항에 도착한 우리 선원들이 북한 당국에 의해 억류됐다는 보고를 들은 YS의 격노가 원인이었다. 청와대는 유화 정책을 거둬들였고, YS의 남은 임기 내내 대북 강경책이 우위를 점했다.
1995년 1월 일본 고베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고베를 시작으로 오사카, 교토까지 피해가 번지며 640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고 당일 오전 YS는 공로명 당시 외무부 장관을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흔히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부르는데 내 지론은 한·일 양국이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되는 것”이라며 당시 돈으로 500만달러 상당의 긴급 구호 물자를 일본에 보낼 것을 지시했다.
그때만 해도 ‘왜 우리가 일본을 도와야 하느냐’는 반감이 야당과 언론 일각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YS의 최대 정적이자 정계 복귀를 준비 중이던 김대중(DJ)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 이사장은 “YS가 잘하는 일도 있구먼”이라며 정부 결정을 적극 지지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한·일 간의 훈풍(薰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YS는 1995년 11월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뒤 공동 기자회견 도중 과거사를 대하는 일본의 태도를 비난하며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고 말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보다 절도 있는 발언을 해주기 바란다”, “품위 없는 표현 방식” 등 반응을 쏟아내며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YS에 대한 일본의 반감은 결국 1998년 1월 한·일 어업협정의 일방적 파기로 이어졌다. 지난달 31일 기밀에서 해제된 외교 문서에 따르면 YS의 ‘버르장머리’ 언급은 예정에 없던 즉흥 발언인 것으로 나타났다. YS는 타고난 승부사요, 동물적 감각을 지닌 정치인이었음이 분명하지만 외교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