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직관’ 압박에도… 대법 ‘출생시민권’ 비호

현직 美대통령 첫 변론 방청
금지 행정명령 ‘위헌’ 여부 쟁점
정부측, 부모 정착·충성도 초점

보수 성향 판사들도 회의적 시각
“세상 변해도 헌법 그대로” 지적
트럼프, 또 제동 땐 정치적 타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핵심 과제로 추진해 온 ‘출생 시민권 금지 행정명령’에 대한 미 연방대법원 재판이 본격화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재판을 참관하며 ‘무언의 압박’에 나섰지만 보수 성향 대법관들마저 행정명령의 헌법 부합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며 위헌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이다.

“이 땅에 태어난 자, 美시민이다!” 미국 워싱턴 연방대법원에서 ‘출생시민권 금지 행정명령’에 관한 구두변론이 진행된 1일(현지시간) 청사 앞에서 시민들이 알파벳 손팻말로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시민이다!”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게티이미지 제공, 워싱턴=로이터·AFP연합뉴스

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날 미국 워싱턴의 연방대법원에서 진행된 구두변론에서 다수의 판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출생지 시민권 제한 시도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번 재판은 미국에 불법으로 체류하거나 영주권이 없는 외국인 부모에서 태어난 자녀에게 출생시민권을 금지하도록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내린 행정명령이 헌법에 위배되는지가 쟁점이다. 미국 헌법은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미국에 귀화했고, 미국의 관할에 있는 모든 사람은 미국과 그들이 거주하는 주의 시민”이라고 명시하며 출생시민권을 인정해 왔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출생시민권은 남북전쟁 직후 노예와 그 자녀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 위해 제정된 조항일 뿐 중국 부유층 등의 미국 원정 출산이나 미국 불법체류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며 행정명령을 강행했고, 이에 민주당 소속 주지사가 이끄는 22개주와 워싱턴이 행정명령에 대해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정부 측 소송대리인 존 사우어 법무부 송무차관은 단순히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점이 아니라 부모의 체류 합법성과 미국 정치체제에 대한 충성 여부를 따져 시민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현대 이민 현실을 고려할 때 헌법이 출생지 시민권을 보장하는지 재검토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에 보수성향의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세상은 변했지만 헌법은 그대로다”라고 지적했다. 또 대법관들은 중국 국적의 부모를 두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자녀의 시민권이 인정됐던 1898년의 ‘웡 킴 아크’ 판례를 중심으로 정부 측 논리에 허점이 있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이 맥락에서 ‘미국에서 태어나고 그 관할에 속하는 사람은 (미국) 시민’이라고 규정한 1952년의 이민 및 국적법에 대한 정부 측 입장도 물었다.

 

이날 변론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이례적으로 방청에 나서 더 관심을 모았다.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현직 대통령이 재판 참석을 하지 않던 그동안의 관례를 깬 것이다. 다만, 대법관들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발언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법원 변론 방청을 마치고 리무진 ‘더 비스트’에 탑승한 모습. 게티이미지 제공, 워싱턴=로이터·AFP연합뉴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상호관세 부과의 근거가 된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 관련 소송 과정에서도 대법원 변론에 나서겠다고 밝혔다가 막판에 참석을 철회한 바 있다. 결국 상호관세는 지난 2월 대법원에 의해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이번 소송에서도 패소할 경우 막대한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해 트럼프 대통령이 관례를 깬 것으로 보인다.

 

이날 구두변론이 진행된 대법원 앞에선 이민자 가족들로 추정되는 시위대가 집결해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위헌 결정을 촉구했다. 한국계 이민자들도 ‘출생시민권 수호, 현 헌법 보장’이라고 적힌 한국어 피켓을 들고 북과 꽹과리 소리를 치며 시위에 참여했다. 행정명령이 합헌 판결이 날 경우 이민자 부모의 자녀로 태어난 수십만~수백만명이 국적을 박탈당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되며, 특히 아시아계의 피해가 극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계 이민자들의 시위 참여를 이끈 ‘민권센터’의 차주범 선임컨설턴트는 “수정헌법 14조에 의해 보장된 헌법적 권리를 트럼프 행정부가 제한적으로나마 폐지를 시도하는 것을 납득하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 내 한국계 가운데 6명 중 1명, 혹은 7명 중 1명은 서류 미비자로 추산된다며 이들이 강도 높은 이민 단속에 이어 출생시민권 금지 행정명령으로 상당히 불안해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