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의료 행위 과정에서 환자가 숨져도 일정 요건을 갖추면 의료진을 처벌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이 국회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고 본회의만을 남겼다. 정부는 필수의료 기피 현상을 줄이기 위한 방안이라고 추진 중이다. 그러나 환자∙시민단체는 ‘환자 인권 침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의료계에서도 의료사고의 사법 리스크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며 ‘개악’으로 규정해 본회의 통과까지 진통이 예상된다.
3일 의료계 등에 따르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최근 필수의료 분야 의료사고에 대해 중대한 과실 기준을 명확히 하고, 보상 시 형사처벌을 완화하는 대신 환자 보호·분쟁조정 절차를 강화한 내용의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직전 열린 본회의에서는 해당 개정안이 상정되지 못했지만, 정부와 여권은 이번 달 안에 통과시키겠다는 방침이다.
개정안은 필수 의료행위를 중증·소아·응급·분만·외상 등으로 정했다. 필수의료 치료과정에서 의료사고로 환자가 사망하거나 치명적인 신체적 피해를 입는 등 업무상과실치사상죄가 발생해도 일부 요건을 충족하면 의료인에 대한 기소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았다. 해당 요건들은 중과실이 아닌 경우, 손해배상액 지급, 책임보험 가입, 의료사고 설명의무 이행 등이다. 필수의료 의료진 보호 및 의료사고 형사절차 특례를 신설해 의료사고심의위원회를 통한 수사 절차 개선, 공소 제한, 반의불벌특례를 적용한다.
환자를 보호하는 하기 위해 의료사고 설명의무를 명문화하고 의료사고트라우마센터를 설치해 의료사고로 인한 환자, 가족 등을 대상으로 심리상담 등을 지원한다. 의료사고 분쟁의 신속하고 공정한 해결을 위해 의료사고감정단의 위원 정원을 확대하고, 감정위원 교육 의무화, 감정부 구성의 전문성 등을 강화해 재감정과 추가감정 요건도 완화한다.
지난해 12월 이재명 대통령이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의료사고가 발생할 시 합의 등이 이뤄지면 형사처벌하지 않는 특례법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후 입법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환자∙시민단체 “환자 인권 침해”
이런 개정안이 국회 상임위까지 통과하자 환자∙시민단체는 즉각 반발했다. 환자단체연합회는 “수사특례나 형사특례 혜택을 받는 필수의료행위는 실제로 의료현장에서 고위험·고난도 특성 때문에 기피가 발생하는 영역인 응급, 중증외상, 분만, 중증소아로 한정해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며 “그런데 이번 개정안은 응급, 중증외상, 분만, 중증소아뿐 아니라 ‘중증’까지 포함돼 있고 ‘등’이라는 표현으로 적용 범위를 계속 넓힐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단체는 사망 의료사고에 대해 손해배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검사의 공소제기 자체를 막는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건 헌법상 국가의 기본권 보호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꼬집었다. 환자단체연합회는 “이미 교통사고 영역에서도 중상해 교통사고에 대한 검사의 공소제기 불가 특례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받은 바 있다”며 “업무상 과실로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 손해배상만으로 검사의 공소제기 자체를 막는 제도는 우리 법체계에 유례가 없다”고 했다.
시민단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환자가 사망하거나 중상해를 입은 경우에도 손해배상을 이유로 형사 기소를 제한하는 것은 환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조치”라며 “의료진의 중과실 유형을 12가지로 정의한 것도 지나치게 불완전하다. 중과실 여부를 의료사고 심의위원회가 판단하는 건 현 사법 체계와 충돌한다. ”고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의료계 “중과실 기준 모호”
정부는 필수의료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 해당 개정안을 마련했지만, 정작 의료계도 반발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는 지난달 31일 성명을 내고 “의료계의 요구를 수용한 것처럼 포장한 기만적인 법안으로 사법 리스크의 근본적 해소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며 “이번 개정안은 형사 면책이라는 허울 좋은 포장지로 덮은 최악의 개악”이라고 평가했다.
의사회는 중과실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며 “진단의 오류나 진료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합병증을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나라는 오직 대한민국밖에 없다”며 “결국 환자 측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중과실로 몰아갈 것이며, 경찰과 검찰의 강압적인 수사는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형사 면책을 조건으로 책임보험이나 공제 가입을 의무화하고 손해배상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형사 면책의 조건으로 내건 것에 대해서도 반발한다. 의사회는 “감옥에 가지 않으려면 사비나 보험금으로 천문학적인 합의금을 물어주라는 협박일 뿐”이라며 “배상 책임을 국가는 빠지고 현장의 의료진과 의료기관에만 떠넘기는 구조는 결국 연쇄적인 진료 축소와 필수의료 기피 현상만 가속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복지부 “다음 본회의에서…조정 여지도”
복지부 측은 해당 개정안과 관련해 “다음 본회의에서 상정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내다봤다. 정은경 복지부 장관은 최근 국회에서 “의사만을 위한 법이 아니라 환자들이 중증 진료를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한 법의 목적이 더 강하다”고 말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논의를 지속하면서 조정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