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와인산지 페네데스를 가다②
일본 TV 프로그램서 돔 페리뇽 이겨 화제
로저 구라트 브뤼 로제 선풍적 인기 불러
140년 넘게 오로지 한길 걷는 ‘까바 장인’
75개월 숙성 ‘더 로저 마크 II’ 샴페인 능가
10여년전 일본 아사히 TV의 프로그램 ‘연예인 등급 체크’에서 재미있는 대결이 펼쳐집니다. 프리미엄 프랑스 샴페인의 대명사 돔 페리뇽(Dom Pérignon) 로제 1975 빈티지와 스페인 스파클링 와인 로저 구라트(Roger Goulart) 브륏 로제 까바(Cava)를 놓고 블라인드 테이스팅해 어떤 와인이 돔 페리뇽인지 맞추는 게임입니다. 정답을 못 맞추면 해당 연예인의 등급은 ‘일류 → 이류 → 삼류’ 식으로 등급이 강등됩니다. 그런데 출연한 연예인 5명 중 3명이 로저 구라트를 돔 페리뇽이라고 지목합니다.
이들은 평소 고급 문화를 즐긴다고 자부하던 연예인들로 “이쪽이 훨씬 풍미가 깊다” “이 와인이야말로 오랜 숙성에서 오는 명품의 맛”이라 로저 구라트를 돔 페리뇽이라고 확신하며 선택합니다.
당시 돔 페리뇽 로제 1975 가격이 15만엔(당시 환율 약 150만원), 로저 구라트는 2000~3000엔(약 2만~3만원)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반전과 재미를 선사합니다. 이 방송을 계기로 일본에서 로저 구라트가 ‘스페인의 돔 페리뇽’이라는 별명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나중에는 돔 페리뇽과 레이블이 비슷한 방패모양이라 ‘가난한 자의 돔 페리뇽’이라는 별명까지 붙게 됩니다.
◆프리미엄 까바의 탄생
1872년 처음으로 까바를 생산한 라벤토스 코도르뉴(Raventós Codorníu)가 ‘까바의 어머니’라면, 로저 구라트는 프리미엄 까바를 상징하는 와이너리입니다. 특히 와인을 잘 모르는 분들도 ‘가난한 자의 돔 페리뇽’이라는 별칭은 들어봤을 정도로 한국 시장에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로저 구라트는 나라셀라에서 수입합니다.
바르셀로나 에스파냐 광장역에서 R6 기차를 타고 50분을 달리면 산 에스테베 세스로비레스 역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와이너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와이너리로 들어서자 담벼락에 붙은 ‘CAVAS DESDE 1882’라는 안내판이 깊은 역사를 말합니다. 로저 구라트는 코도르뉴 보다 불과 10년 뒤부터 까바를 생산하기 시작한 선구자중 하나입니다.
와인업계에서 약 24년 동안 일한 홍보담당 디렉터 데이비드 피에라(David Piera)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넵니다.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코도르뉴와 달리 로저 구라트는 고즈넉합니다. “로저 구라트는 관광형 와이너리가 아니라 박물관은 따로 없어요. 지하 셀러와 실제 와인 생산 시설만 있고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도 가까이서 직접 볼 수 있답니다. 직원들은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일하기 때문에 근속 기간이 매우 길어요. 와인메이커도 거의 20년 가까이 근무할 정도죠.”
피에라와 와이너리를 둘러봅니다.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마당의 우물과 빛바랜 석조 건물 디자인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유가 있네요. 와이너리는 가우디와 동시대를 풍미한 건축가 이그나시 마스 이 모렐(Ignasi Mas i Morell)이 설계한 웅장한 모더니즘 양식 건물로, ‘까바의 성당’으로 불립니다. 바르셀로나의 이슬람풍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결합된 화려한 외관이 특징인 라 모누멘탈 투우장(La Monumental de Barcelona) 등이 바로 그의 작품입니다. 또 시체스의 랜드마크로 ‘시계탑 집’으로 불리며, 지붕의 화려한 타일 장식(트렌카디스)이 돋보이는 카사 바르토메우 카르보넬(Casa Bartomeu Carbonell)도 그가 설계했습니다.
피에라는 까바의 역사부터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19세기 중반, 필록세라가 유럽을 휩쓸면서 프랑스 생산자들이 남쪽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카탈루냐에 2차 병발효·숙성을 거치는 전통방식(샴페인 방식) 스파클링 와인 양조 기법을 전수합니다. 카탈루냐의 농부들과 사업가들은 이 기술을 배운 뒤 페네데스 지역이 고품질 스파클링 와인을 생산할 수 있음을 확인했고 일부 가문은 이를 사업화하면서 까바 산업이 시작됐답니다.”
◆로저 구라트 역사
로저 구라트는 프랑스 샴페인 지역의 양조 방식에 깊은 영감을 받은 조셉 카날스 카펠랴데스
(Josep Canals Capellades)가 샴페인에 필적하는 스페인 최고급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비전을 세우고 1882년 설립합니다. 피에라는 로저 구라트가 처음부터 ‘스페인 최고의 샴페인 스타일 와인’을 만들기 위해 설립된 와이너리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다른 와이너리들이 스틸 와인을 만들다가 스파클링 와인을 시작한 것과 달리, 로저 구라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파클링 와인만 생산해왔습니다. 지금까지도 스틸 와인은 만들지 않습니다. 특히 짧게 병숙성하는 제품은 아예 만들지 않고 항상 장기 숙성하는 까바만 생산했는데 이는 로저 구라트가 다른 까바 생산자들과 크게 차별화되는 독특한 특징입니다.”
조셉 카날스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다섯 명의 딸만 있었는데, 그중 장녀가 누비올라(Nubiola) 가문의 자제와 결혼하고 사위가 경영에 참여하면서 와이너리 이름은 ‘카날스 앤 누비올라(Canals & Nubiola)’가 됩니다. 당시 스페인은 가난하던 시절이라 자금이 필요했던 가문은 우여곡절 끝에 브랜드를 매각했지만 다행히 와이너리 건물, 생산시설, 직원들은 그대로 지켰습니다. 하지만 조상의 이름 ‘카날스’를 쓰지 못하게 된 가문은 새 브랜드 이름을 모색합니다. 족보를 뒤져 가문의 뿌리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 ‘로저(Roger)’와 프랑스 혈통의 ‘구라트(Goulart)’를 찾아냈고 이를 합친 새 브랜드 ‘로저 구라트’를 1950년대 런칭합니다.
로저 구라트는 2017년 스페인의 역사적 와인 그룹CVNE(Compañía Vinícola del Norte de España)에 인수됩니다. 하지만 와인메이커와 스타일과 품질 중심 양조 철학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연간 약 100만병을 생산하는 중형 와이너리로 성장합니다. 한국 시장에는 2011년부터 수입되고 있습니다. 피에라는 한국 시장은 와인 문화 수준이 높고 품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매우 매력적인 시장이며 약 15년 동안 꾸준히 성장해왔다고 평가합니다. “로저 구라트가 최초의 까바는 아니지만, 고품질 까바 분야에서는 선구자입니다. 산도는 북유럽 스파클링 와인보다 부드럽고 지중해 기후 덕분에 더 균형 잡힌 스타일을 선보입니다. 알코올 도수도 비교적 낮아 매우 다양한 음식과 잘 어울려요. 특히 다양한 맛이 공존하는 아시아 음식과 궁합이 좋아요. 타파스, 한식 등과도 매칭이 좋답니다.”
◆프리미엄 까바 비결은 장기 병숙성
와이너리 정원에서 덩굴식물로 덮인 작은 쪽문을 열면 로저 구라트 까바가 완성되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나타납니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통로 계단을 따라 지하 4~5층가량을 내려가면, 시원하게 뻗은 길을 따라 까바가 맛있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와이너리 건설 당시 직접 굴착한 지하 셀러는 깊이 30m, 총 길이 1km에 달합니다. 피에라는 일 년 내내 섭씨 14~15도의 일정한 온도와 85%의 습도, 그리고 완벽한 정적을 유지해 까바가 최상의 상태로 숙성될 수 있는 독보적인 환경을 제공한다고 설명합니다. 셀러 벽에 걸린 커다란 그림은 카탈루냐의 수호성인 산 조르디로 까바가 잘 숙성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피에라는 ‘ESPAI JOSEP VALLS(조셉 발스 공간)’라고 적힌 곳으로 안내합니다. 안내판에는 ‘우리 와인의 설계자이자 창조자로서, 농부의 전통적인 지혜와 양조가의 현대적인 기술을 조화롭게 결합한 인물’라는 설명이 적혀있습니다. “까바는 규정상 최소 9개월만 숙성하면 되지만, 로저 구라트는 최소 12개월에서 길게는 무려 75개월까지 숙성 기간을 거칩니다. 조셉 발스는 40년 이상 로저 구라트의 수석 와인메이커로 근무하며, 장기 숙성 철학을 완성한 인물이에요. 그는 지하 30m 깊이 셀러의 독특한 환경을 잘 활용해 샴페인에 필적하는 복합적인 풍미를 까바에 입혔답니다.”
피에라가 까바 한 병을 꺼내 불을 비추자 바닥에 쌓인 효모 앙금이 또렷하게 보입니다. 이 앙금과 함께 오래 숙성할수록 스파클링 와인의 풍미는 더욱 깊어집니다. 조셉 발스는 스페인 토착 품종에 샤르도네를 적절히 섞어 구조감과 우아함을 극대화하는 블렌딩 비율도 정립했습니다.
조셉 발스의 제자가 현재 와인양조를 총괄하는 양조학자이자 와인메이커 페드로 무뇨스 고메스(Pedro Muñoz Gómez)입니다. 그는 진정한 숙성의 묘미는 10개월 이후부터 형성된다는 신념 때문에 로저 구라트는 장기 병숙성을 고집한다 설명합니다. “10개월부터 효모는 자가분해를 거치며 세포벽이 부서지고 단백질과 아미노산을 흘러 보내요. 이때 와인은 갓 구운 빵이나 견과류 같은 깊고 복합적인 풍미와 단단한 구조감을 갖추게 되며, 버블 또한 한층 더 미세하고 지속적인 형태로 발전한답니다.” 실제 ‘더 로저 마크 II 2017’은 무려 75개월을 숙성하는 까바로, 토착 품종에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까지 블렌딩하여 샴페인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와인은 가장 완벽한 해에만 소량 생산되며, 최근 한국에도 소량이 수입됐습니다.
◆오로지 빈티지 까바만 고집
로저 구라트가 명성을 얻은 또 다른 이유는 ‘빈티지 까바’만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넌빈티지 샴페인은 물론 까바도 보통 일정한 품질을 위해 여러 해의 포도즙을 섞어 만듭니다. 매년 기후에 따라 포도의 품질과 수확량이 다르기 때문에 일정한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 해 빈티지를 섞는 겁니다.
하지만 로저 구라트는 그해 수확한 포도로만 와인을 만듭니다. 모든 까바가 ‘빈티지 까바’인 셈입니다. 그 해 포도로만 만들기 때문에 대량 생산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장기 숙성을 견딜 수 있는 최상급 포도만 사용할 정도로 엄격하게 포도알을 선별합니다. 특히 첫 압착 주스 중에서도 품질이 좋은 50% 미만의 포도즙만 사용합니다. 샴페인의 평균 압착 기준이 포도 약 1.95kg당 1리터이지만 로저 구라트는 약 2~2.2kg에서 1리터를 얻어낼 정도로 포도즙 추출에 훨씬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합니다.
▶로저 구라트 브뤼 코랄 로제(Brut Coral Rosé)
이름처럼 은은한 코랄(산호색) 또는 연한 핑크빛이 여심을 자극하며, 작고 섬세한 버블이 지속적으로 올라옵니다. 신선하고 강렬한 딸기, 라즈베리 등 붉은 베리류의 향이 지배적입니다. 여기에 장미꽃 같은 화사한 꽃향기와 약간의 감귤류 향이 어우러집니다. 입에서는 산뜻한 산미와 풍부한 과실 맛이 느껴지며 버블의 질감은 크리미하고 부드럽습니다. 피니시는 깔끔하고 균형 잡힌 미네랄 뉘앙스를 남깁니다. 새우 구이, 연어 타르타르, 굴 요리, 조개찜, 가벼운 크림 파스타, 닭고기 요리, 스시 또는 롤과 잘 어울립니다. 디저트 과일 타르트, 마카롱과 매칭이 뛰어납니다. 가르나차 70%, 피노누아30%. 12개월 병숙성.
▶로저 구라트 브뤼 로제 밀레짐(Brut Rosé Millésimé)
로저 구라트의 베스트셀러이자 상징적인 로제 카바입니다. 코랄 로제보다 가르나차 비중이 90%로 매우 놓아 더 진한 색감과 풍부한 과일 풍미를 보여줍니다. 2022년 빈티지부터 유기농 인증을 받았습니다. 강렬한 딸기, 체리, 라즈베리로 시작해 붉은 감초, 약간의 크리미한 뉘앙스가 더해집니다. 생동감 넘치는 산미와 부드러운 질감의 버블이 잘 어우러지고 과일의 단맛과 산도의 밸런스도 뛰어납니다. 피니시에서 과일의 잔향이 풍부하게 이어집니다. 참치 타르타르, 훈제 연어, 구운 갑각류, 파에야, 리조또, 매콤한 태국 요리나 인도 요리, 베리·치즈케치크와 잘 어울립니다. 가르나차 90%, 모나스트렐 5%, 피노 누아 5%. 12개월 병숙성.
▶로저 구라트 브뤼 밀레짐(Brut Millésimé)
페네데스의 토착품종만 사용해 신선함과 숙성미의 균형을 맞춘 로저 구라트의 핵심 라인업입니다. 청사과, 배, 감귤류의 과실 향이 풍부하며, 뒤이어 파인애플 같은 열대 과일의 힌트가 나타납니다. 숙성을 통한 효모, 갓 구운 빵, 가벼운 토스트 향도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입에서 신선한 과일 맛과 고소한 풍미가 조화를 이룹니다. 클래식한 브뤼 스타일로 다양한 음식과 훌륭한 마리아주를 보여줍니다. 스시, 굴, 구운 새우, 가리비 관자 요리, 만체고 등 숙성 하드치즈, 짭조름한 아몬드나 견과류, 가벼운 파스타, 딤섬과 잘 어울립니다. 샤렐로, 40%, 마카베오 30%, 파레야다 30%. 14개월 숙성.
▶로저 구라트 엑스트라 브륏 그랑 레세르바 조셉 발스(Extra Brut Gran Reserva Josep Valls)
로저 구라트의 장기 병숙성을 상징하는 프리미엄 까바입니다. 레시피를 완성한 조셉 발스에게 헌정하는 까바로 36개월 병숙성합니다. 자렐로 30%, 마카베오 20%, 파렐라다 20%, 샤르도네 20%, 피노누아 10%를 섞어 구조감과 우아함을 더했습니다. 잔당이 리터당 약 4g 내외로 매우 낮아, 드라이하고 깔끔한 맛이 도드라집니다. 잘 익은 사과와 복숭아의 과일햐과 갓 구운 빵(브리오슈), 구운 아몬드, 효모의 고소한 향이 어우러집니다. 크리미한 질감과 세련된 산미가 조화롭고 미네랄 풍미와 함께 우아하고 긴 여운을 남깁니다. 해산물 요리, 가금류 구이, 숙성치즈, 푸아그라와 잘 어울립니다.
▶로저 구라트 더 로저 마크 II(The Roger Mark II) 2017
일반적인 까바의 숙성 규정(9개월)을 압도적으로 뛰어넘어, 지하 30m 셀러에서 무려 75개월동안 효모와 함께 숙성됐습니다. 효모의 자가분해를 통해 샴페인을 능가하는 깊고 복합적인 풍미와 아주 미세하고 실크처럼 부드러운 버블이 돋보입니다. 샤렐로 30%, 마카베오 20%, 파레야다 20%, 피노 누아 15%, 샤도네이 15%. 매년 만들지 않고 포도 품질이 가장 완벽했던 해에만 소량 생산합니다. 2013년 첫 출시 이후 2017년 빈티지가 역대 두 번째 생산입니다. 오랜 숙성이 선사하는 갓 구운 브리오슈, 구운 견과류, 말린 과일의 복합미가 매력입니다. 단단한 구조감과 크리미한 질감, 그리고 산뜻한 산미가 완벽한 밸런스를 이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