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와인 산지 페네데스를 가다③>
1979년 파리와인올림피아드 카베르네 소비뇽 1위
보르도 전설 샤토 라투르·라 미시옹 오브리옹 눌러
1980년대부터 멸종된 고대 품종 복원 프로젝트
64종 복원 성공해 포르가다·모네우 와인 선보여
1979년 6월 15일~1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저명한 미식 잡지 고 미요(Gault & Millau) 주최로 와인 올림피아드(Wine Olympiad)가 개최됩니다. 카베르네 소비뇽, 피노누아, 시라, 샤르도네, 리슬링 등 품종별로 23개 부문에 걸쳐 10개국 와인 전문가 62명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점수를 매깁니다. 출품된 와인은 모두 33개국 330종. 이중 카베르네 소비뇽 대결에서 1위를 차지한 와인은 스페인 파밀리아 토레스(Familia Torres)가 출품한 마스 라 플라나(Mas La Plana·당시 명칭 그란 코르나스 에티퀘타 네그라, Gran Coronas Etiqueta Negra) 1970 빈티지입니다. 토레스 와인은 보르도 그랑크뤼 클라세 1등급 5대 샤토중 하나인 샤토 라투르(Château Latour), 라 미시옹 오 브리옹(La Mission Haut-Brion) 등 보르도의 전설적인 와인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해 와인업계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와인의 블랙 레이블 때문에 이 사건은 ‘유럽의 검은 전설’로 불리며 토레스를 전 세계에 각인시킵니다.
◆고대 품종 복원 선구자
스페인 카탈루냐 와인 산지 페네데스(Penedès)는 까바 등 화이트 와인이 전체 생산량의 80%를 차지하지만 레드 품종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가르나차와 화이트 품종 샤르도네, 소비뇽블랑, 리슬링 등으로 다양한 스틸 와인도 생산합니다. 맹주가 스페인을 대표하는 와이너리 파밀리아 토레스(Familia Torres)입니다.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광장 기차역에서 통근열차 R4를 타고 1시간 20분을 달리면 빌라프랑카 델 페네데스(Vilafranca del Penedès) 역에 닿습니다. 이곳에서 택시로 10분 거리에 토레스가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1870년 설립된 토레스의 5대손 미레이아 토레스 마차세크(Mireia Torres Maczassek)가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다며 반갑게 맞습니다. 그는 토레스의 R&D 디렉터이자 부티크 와이너리 장 레옹(Jean Leon)의 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미레이라는 포도 품종 전문가로 바르셀로나 소재 사리아 화학연구소(Universitat Ramon Llull, 라몬 유이 대학교)에서 화학공학 학위를 취득했고 몽펠리에 국립 농업고등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Agronomique)에서 양조학 및 포도 재배학 디플로마를 취득했습니다.
미레이라가 이런 전공을 바탕으로 쌓은 가장 큰 업적은 필록세라 등으로 멸종됐던 토레스의 고대 품종 복원 프로젝트. 기후변화 위기에 대응하고 카탈루냐 와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로, 미레이라의 부친 미구엘 A. 토레스(Miguel A. Torres)가 1980년대 중반 첫발을 디뎠습니다. 그는 지역 일간지에 “멸종된 줄 알았던 희귀 품종을 발견하면 연락해달라”는 광고를 냅니다. 농부들의 제보를 받으면 전문가들이 현장에 나가 포도나무의 상태를 확인하고, 프랑스 몽펠리에 대학과 협력해 DNA 분석을 거쳐 고유 품종임을 확인하는 작업을 거칩니다. 미레이라는 복원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가 포르카다(Forcada), 모네우(Moneu), 곤파우즈(Gonfaus), 피레네(Pirene), 케롤(Querol), 가루(Garró) 등 카탈루냐 토착 품종 64종 복원에 성공하고 잠재력이 높은 품종을 골라 속속 시장에 선보이고 있습니다.
대표 복원 품종이 포르카다(Forcada)로 클로 안세스트랄(Clos Ancestral) 화이트로 만들어집니다. 포르카다는 해발 고도 약 500m 이상에서 살아남았고 추위와 가뭄에 모두 강한 생명력을 보여 현재 토레스가 가장 주목하는 복원 품종입니다. 화이트 품종이지만 매우 늦게 익어 지구 온난화에 대응할 수 있는 품종으로 평가됩니다. 특히 기온이 올라도 천연 산도가 잘 유지됩니다. 또 향이 매우 강렬하고 복합적인 ‘아로마틱 화이트’ 스타일로 흰 꽃향기, 레몬, 자몽의 시트러스류, 타임과 로즈마리의 허브 풍미가 층층이 느껴집니다. 약간의 훈연 향이나 미네랄 느낌도 특징입니다. 입안을 짜릿하게 만드는 날카롭고 깨끗한 산미가 일품이고 피니시에서 느껴지는 짭조름한 미네랄리티가 구조감을 완성합니다. 토레스는 이 품종의 잠재력을 믿고 블렌딩이 아닌 100% 단일 품종 와인으로 한정 생산합니다.
레드 품종 모네우(Moneu)도 지구 온난화 시대의 구원수로 평가받으며 클로 앤세스트랄 레드로 생산됩니다. 이 품종은 가뭄과 열기에 극도로 강해 기온이 상승해도 포도가 천천히 익습니다. 뜨거운 여름을 지나 서서히 당도와 산도의 밸런스가 맞춰지는 덕분에 늦수확할 수 있고 적당한 알코올 도수를 만들어냅니다. 특히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랍니다. 모네우는 무겁고 진한 스타일보다는 우아하고 신선한 스타일로 빚어지며 잘 익은 검은 자두와 체리 같은 과실 향이 풍부하며, 끝맛에서 은은한 꽃향기(보라색 꽃)와 기분 좋은 스파이시함이 느껴집니다. 또 산미는 매우 세련되고 탄닌은 촘촘하면서도 부드러워 입안에서 매끄러운 질감을 줍니다. 주로 템프라니요, 가르나차와 블렌딩되며 모네우는 이 와인에 생동감과 복합미를 더합니다.
또 피레네 산맥 인근에서 발견된 레드 품종 피레네(Pyrene)는 기온이 낮은 지역에서도 잘 익으며 향이 풍부합니다 곤파우즈(Gonfaus)는 가뭄에 매우 강한 품종으로, 기후 변화 시대에 토레스가 가장 주목하는 레드 품종 중 하나입니다.
토레스 아이코닉 와인 그란스 무라예스(Grans Muralles)에 블렌딩되는 두 품종도 복원 프로젝트로 탄생했습니다.
케롤(Querol)은 매우 희귀한 ‘암꽃 품종’으로 자연 수정이 어려워 재배가 까다롭고 생산량도 극히 적습니다. 포도알이 작아 농축미가 뛰어나고 탄닌이 강하지만 섬세함도 있어 힘과 우아함을 모두 갖췄습니다. 구조감과 장기 숙성력 부여합니다. 블랙베리, 블랙체리, 허브, 향신료가 특징이고 숙성되면 가죽, 흙, 발사믹 노트도 나옵니다.
가로(Garró)는 껍질이 두꺼워 탄닌이 강하고 골격이 단단한 장기 숙성에 도움을 줍니다. 더운 기후에서도 산도 유지력 뛰어나 기후변화 대응 품종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블랙베리, 자두, 허브, 스파이스 뉘앙스가 특징입니다.
미레이라는 복원 프로젝트는 자신 인생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처음에는 1900년대 초 필록세라로 사라진 카탈루냐 토착 품종을 복원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단순 복원을 넘어 기후변화에 적응 가능한 품종 선별로 방향을 확장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상업적 목적이 아니라 카탈루냐 와인 산업 전체를 위한 사회적 프로젝트랍니다. 600여 포도 재배자와 협업해 연구 결과를 공유하죠. 기후변화 대응 연구를 통해 와인 산업 전체에 기여하고 있다고 자평합니다. 지금도 카탈루냐 전역 140개 이상 지역에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답니다. 복원한 품종 중 포르카다는 산도가 높아 올해 말쯤 세계 최초로 포르카다 스파클링 와인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최근 한국을 비롯해 스파클링 와인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토레스에게도 매우 중요한 기회입니다. 스페인뿐 아니라 칠레 등 다양한 시장에 스파클링 와인 공급을 확대할 계획입니다.”
토레스는 2008년 스페인 최초로 무알코올 와인도 선보였는데 현재 토레스에서도 매우 중요한 제품군이 됐으며 앞으로도 이 분야는 계속 성장할 것으로 미레이라는 전망합니다.
미레이라는 2004년에 와이너리 기술 이사를 맡아 리베라 델 두에로(Ribera del Duero), 프리오랏(Priorat), 리오하(Rioja), 루에다(Rueda) 등 스페인 주요 와인 산지 프로젝트 개발을 총괄했습니다. 현재 파밀리아 토레스 재단 이사장과 카탈루냐 와인 기업들의 경쟁력 강화를 도모하는 이노비(INNOVI) 클러스터의 의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1559년부터 시작된 토레스 역사
토레스 가문이 포도 재배자였다는 최초의 기록은 15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런 역사를 말해주듯, 토레스 와이너리로 들어서면 정원에 놓인 포도즙을 짜던 대형 나무 압착기가 눈길을 사로 잡습니다. ‘FAMILA TORRES’라고 적힌 압착기 너머에는 양복에 긴 코트를 걸치고 손에는 탑햇을 든 남자가 먼 곳을 응시하고 섰습니다. 발 앞에 적힌 이름은 하이메 토레스 벤드렐(Jaime Torres Vendrell·1843–1904). 그가 바로 세계적인 스페인 와인기업 토레스를 일군 창업자입니다.
1843년 스페인 페네데스(Penedès)에서 태어난 하이메는 젊은 시절 쿠바(당시 스페인령)로 건너가 운송업과 석유 사업 등으로 큰 성공을 거뒀고 1870년 막대한 부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포도를 재배하던 형 미겔(Miguel)과 토레스를 설립합니다. 형제는 당시 페네데스에서 가장 큰 규모의 와인 셀러를 건설하고 브랜디도 생산합니다. 이는 훗날 토레스가 세계적인 브랜디(Torres 10, Torres 20 등)를 생산하는 기반이 됐습니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나기 몇 달 전, 빌라프랑카 델 페네데스 기차역을 겨냥한 폭격으로 와이너리가 완파됐지만 토레스 가문은 불굴의 의지로 짧은 시간에 시설을 재건합니다.
토레스는 미레이라의 부친 미겔 A. 토레스(Miguel A. Torres)가 프랑스에서 포도 재배와 양조를 공부한 뒤 1962년 가업에 합류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그는 혁신적이고 대담한 접근으로 토레스 와인을 품질을 대폭 끌어 올렸고, 1970년대 보르도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을 재배해 파리 와인 올림피아드에서 우승한 마스 라 플라(Mas La Plana)를 만들어 냅니다. 또 스페인 최고의 샤르도네 중 하나로 평가받는 밀만다(Milmanda)도 그의 작품입니다. 또 1979년 칠레, 1982년 캘리포니아로 와인 사업을 확장해 와인 제국 건설을 완성합니다. 현재 토레스는 토착 품종 복원 프로젝트와 함께 204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를 달성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태양광 패널 설치로 와이너리 전기 사용의 약 50%를 충당하고 와인병 무게를 420g로 줄여 탄소를 대폭 감축하고 있습니다. 2008~2024년 병당 CO2 배출량을 40% 감축했고 2030년까지 60% 감축, 2040년에는 완전한 무배출을 목표로 합니다.
◆클래식 들으며 숙성되는 와인
토레스 와이너리는 워낙 넓어 꼬마 열차를 타고 둘러봐야합니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도열한 그림 같은 진입로를 지나 지하 셀러로 들어서자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 나옵니다. Mas La Plana, Milmanda, Grans Muralles, Frasola 등 브랜드별로 나뉜 구역에 차곡차곡 쌓인 오크통에서 토레스 와인들이 맛있게 익어 갑니다. 은은한 음악을 흘러나오니 와인들도 스트레스 없이 잘 익어갈 것 같네요.
▶마스 라 플라나(Mas La Plana)
1979년 파리 와인 올림피아드 1위에 올라 토레스를 전 세계에 알린 플래그십 와인입니다. 당시 와인 이름은 그란 코르나스 에티퀘타 네그라(Gran Coronas Etiqueta Negra) 였는데 싱글빈야드 이름을 강조하기 위해 마스 라 플라나로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카베르네 소비뇽에 템프라니요, 모나스트렐를 블렌딩했지만 현재는 카베르네 소비뇽 100%로 만듭니다. 블랙커런트, 블랙베리, 체리 등 응축된 과실향을 바탕으로 트러플, 감초, 후추, 정향 같은 스파이시한 노트가 더해집니다. 오크 숙성이 주는 바닐라, 토스트, 커피, 다크 초콜릿 향이 복합미를 더합니다. 숙성되면 삼나무, 담배, 가죽, 트러플, 후추, 아니스의 매콤한 향신료가 올라옵니다. 탄탄한 구조감을 지녔지만 벨벳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정교한 탄닌이 특징입니다. 산도가 뒤에서 잘 받쳐주고 긴 여운을 남깁니다.
▶푸르가토리(Purgatori)
가르나차, 카리녜나, 시라를 블렌딩한 푸르가토리는 잘 익은 블루베리, 자두향으로 시작해 지중해 허브의 향긋함과 스모키한 노트, 말린 자두, 카카오의 복합적인 아로마가 더해집니다. 부드럽고 둥근 탄닌과 뛰어난 산도로 무겁지 않고 세련된 느낌을 줍니다. 스파이시한 피니시가 길게 이어지며 미네랄리티가 돋보입니다.
와인 이름 푸르가토리는 카탈루냐어로 ‘연옥’을 뜻합니다. 가톨릭 교리에서 죄를 씻고 천국으로 가기 전 머무는 정화의 장소가 연옥입니다. 포도가 생산되는 라라뇨(L'Aranyó) 농장의 혹독한 역사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었습니다. 1770년쯤 몬세라트 수도원(Abbey of Montserrat)은 기도를 게을리하거나 규율을 어긴 수도사들을 이 외딴 농장으로 보냈는데, 여름엔 극도로 덥고 겨울엔 뼈가 시릴 만큼 추운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이에 수도사들은 이곳의 생활을 죄를 씻는 연옥의 고통처러 여겼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서 만든 와인은 너무 맛있었고 거대한 오크통이 통째로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이에 수도사들은 “천사들이 연옥에 있는 우리를 가엽게 여겨 와인을 신에게 받치기 위해 통째로 가져갔다”며 속죄가 받아들여졌다고 믿었습니다. 레이블에는 천사들이 오크통을 들고 날아가는 모습을 그려 과거 수도사들의 고행과 인내를 기립니다.
▶퍼페추얼(Perpetual)
프리미엄 가르나차로 유명한 스페인 프리오랏(Priorat)의 75~100년 수령 올드 바인으로 만들어 깊이감이 남다릅니다. 까리네냐를 주 품종으로 가르나차를 섞은 퍼페추얼은 체리, 블랙베리 잼과 같은 검은 과실 향이 풍부합니다. 프리오랏 특유의 리코레라(슬레이트) 토양이 선사하는 미네랄을 베이스로 정향, 후추, 감초 등의 향신료와 타임, 유칼립투스의 지중해 허브향이 어우러집니다. 오크 숙성이 주는 훈연향, 코코아, 토스트 향 등 매우 복합적인 부케도 잘 느껴집니다. 풀바디의 단단하고 짜임새 있는 구조감을 갖췄으며, 벨벳 같은 부드러운 탄닌과 산도의 균형이 뛰어납니다. 여운에는 초콜릿, 담배 향의 뉘앙스가 길게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