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퐁피두(1911∼1974)는 1959년 출범한 프랑스 제5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이다. 초대 대통령 샤를 드골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운 레지스탕스(저항군) 투사인 것과 달리 퐁피두는 2차대전 기간 상대적으로 조용한 삶을 살았다. 전후 프랑스의 유력 지도자로 떠오른 드골은 널리 인재를 구하던 중 그랑제콜 가운데 하나인 파리 고등사범학교(ENS) 졸업생이자 지성인인 퐁피두에 주목했다. 정작 퐁피두는 공직 진출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드골 또한 1946년 의원내각제 정부 구조의 제4공화국 출범에 실망해 정계를 떠나며 두 사람은 함께하지 못했다.
대통령제 정부 형태의 5공이 들어선 뒤 복귀한 드골은 퐁피두에게 다시 ‘러브콜’을 보냈다. 1962년 4월 드골 정부의 총리에 오른 퐁피두는 1968년 7월까지 6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켰다. 드골이 대통령으로 재직한 기간이 1959년부터 1969년까지 10년 동안이란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드골의 임기 내내 그의 곁을 지킨 셈이다. 드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퐁피두는 영국의 유럽공동체(EC·현 유럽연합) 가입을 승인하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는 등 드골 노선과의 차별화를 꾀했다. 그가 대통령 재임 도중인 1974년 4월 희귀 혈액암으로 사망했을 당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직접 국장(國葬)에 참석해 고인을 기렸다. 한국 정부 대표로는 김종필 국무총리가 조문을 했다.
퐁피두는 생전에 파리를 세계 문화예술의 확고한 중심으로 만들고자 했다.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의 점령 통치를 받은 파리는 전후 미국 뉴욕, 영국 런던에 밀려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파리 시내 중심가의 퇴락한 보부르 지역 일대를 재개발 대상으로 선정한 뒤 그곳에 장차 국립 현대미술관으로 쓰일 건물을 지어 올렸다. 완공 후 개관이 이뤄진 1977년 1월 퐁피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나, 프랑스 정부는 고인을 추모하는 뜻에서 ‘퐁피두센터’라는 이름을 붙였다. 배선·냉난방·배관 등 기능적 설비를 건물 바깥에 배치한 외양 때문에 “흉측하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으나, 오늘날에는 설계자들의 실험 정신을 높이 사며 “세계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라는 상찬을 바치는 이가 많다.
지난 2, 3일 이틀 일정으로 한국을 국빈 방문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부부가 방한 기간 짬을 내 서울 여의도 63빌딩을 찾았다. 오는 6월 문을 열 ‘퐁피두센터 한화’를 미리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옛 63빌딩 별관을 리모델링한 퐁피두센터 한화는 면적 1만1000㎡에 4층 규모다. 프랑스 건축의 거장 장 미셸 빌모트(78)가 설계를 맡았다. 빌모트는 앞서 인천국제공항 실내 디자인, 서울 가나아트센터 설계 등을 통해 한국과 인연을 맺은 바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퐁피두센터 한화는 프랑스와 한국을 잇는 가교”라며 “양국 예술계 간 대화를 이끄는 플랫폼이 될 것”이란 바람을 드러냈다. 그의 말처럼 한국, 더 나아가 아시아에서 프랑스 문화예술의 진수를 접할 수 있는 명소로 자리매김하길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