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길’을 잇고, 사라진 ‘길’을 불러낸 여자 ‘길의 품 속에 영면’…‘제주올레 길’ 만든 서명숙 이사장 지병으로 별세

정치부 여기자 1세대에서 시사지 최초 여성 편집장…도보여행 혁신가로
2006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치유·성찰 경험
2007년 제주올레 1코스 조성
20년간 제주 가치 확산…제주를 넘어 세계로
“걷는 길은 우리 국토 곳곳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걷지 않았고, 잊어버렸고, 상실한 것일 뿐. 길을 만들기 이전에 최대한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 찾아내야만 한다. 그런 길이라야 걷는 이들에게 감동과 위안, 그리고 행복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므로. 지친 현대인들이 걷고 싶어하는 길은 세련된 산책길이 아니라, 자연이 살아 숨쉬고 조상들의 땀과 숨결이 배인 소박한 흙길 돌길 마을길이므로.”
사단법인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 제주올레 제공

대한민국에 걷기 열풍을 불러일으킨 제주올레 길을 낸 서명숙 이사장이 7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8세.

 

사단법인 제주올레에 따르면 서 이사장은 제주 서귀포 출신으로, 정치부 여기자 1세대로 꼽히면서 시사지 최초 여성 편집장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다. 22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과로와 경쟁 속에서 몸과 마음이 지친 그녀는 2006년 스페인 산티아고로 불쑥 떠났다. 서 이사장은 순례길 800㎞를 걸으며 비로소 치유와 성찰의 시간을 얻었다. 그 경험을 통해 고향인 제주에 올레길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30년만에 귀향했다. 2007년 여름의 일이었다.

 

2017년 6월 몽골올레 코스 개장식에서 올레꾼들과 기념 촬영하는 서명숙 이사장(왼쪽에서 세번째). 임성준 기자

서 이사장은 제주올레 길을 조성하며 ‘여행자와 지역민, 그리고 자연이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철학을 일관되게 강조해왔다. 행정과 자본 중심의 개발이 아닌, 자원봉사자와 지역 주민이 주체가 되는 민간 주도 방식으로 옛길을 살려내고 곶자왈과 해안, 마을을 잇는 생태적 도보 여행길을 만들고자 했다. 이는 단순한 관광 상품의 개발이 아니라 제주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보전하면서도 지역민의 삶과 공동체를 되살리는 실천이었다.

 

그 결과 2007년 사단법인 제주올레를 발족하고 제주올레 1코스를 개장한 이후, 2022년 27번째 코스인 18-2코스를 개장하며 제주를 순수 도보로만 여행할 수 있는 제주올레 길 27개 코스, 437㎞를 완성했다.

 

제주올레 길은 대한민국에 도보여행, 생태여행 문화를 확산시킨 대표 사례다. 서 이사장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아쇼카 펠로우’에 선정됐다. 2017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 대통령 훈장을 수상했다. 특히 제주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지키면서 지역 공동체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관광 모델을 제시했다. 제주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지속가능성과 공존의 가치를 보여주는 세계적 모범 지역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2017년 6월 몽골올레 2개 코스를 조성해 각 코스 출발점 헝허르 마을과 고르히-테렐지 국립공원 초입부에서 개장식을 열었다. 개장식에서 인사말하는 서명숙 이사장. 임성준 기자

고인이 변함없이 제주올레 최우선 가치로 내세운 것은 ‘치유와 성찰’이었다. 생전 여러 자리에서 “올레길은 나 자신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운 행복한 종합병원이다”라며 걷기를 통해 심신을 회복하고 건강한 삶을 이어올 수 있었다고 강조해왔다.

 

서 이사장은 ‘클린올레’ 환경 캠페인을 통해 길을 걸으며 환경을 보호하고, 주민행복사업을 통해 마을 자원을 활용한 콘텐츠를 개발하며, 여성·청소년·이주민·장애인까지 참여하는 포용적 모델을 통해 제주올레 길의 지속가능성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는 일본 규슈와 미야기, 몽골 등지에 제주올레의 철학을 수출하고 산티아고 순례길 등 세계 여러 길과 우정을 맺음으로써 ‘길이 단순히 이동하는 통로만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문화가 공존하는 살아있는 유산’이라는 가치를 전파하는데 애썼다.

 

㈔제주올레 안은주 대표는 “서 이사장은 서울에서 병들었던 내가 올레길을 내고 걸은 덕에 오늘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고 늘 말씀하시곤 했다“며 ”누군가에게는 힘, 누군가에게는 희망, 누군가에게는 치유가 된 이 길을 내어준 이사장을, 제주올레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과 함께 가슴 깊이 추모한다”고 전했다.

 

앞서 서 이사장의 막내 동생인 서동성 제2대 제주올레 탐사대장이 지난달 14일 별세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제주올레 초창기인 2008년 제1대 탐사대장이었던 형 서동철(2020년 작고)에 이어 탐사 활동과 조직 운영에 참여해 초기 올레길 조성과 운영 기반을 함께 마련했다. 

 

서 이사장의 빈소는 서귀포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영결식은 10일 오전 9시 제주올레 6코스 서복공원 잔디광장에서 진행될 예정이다.